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겨울의 재료들/ 안희연
시낭송행복플러스
2018. 2. 9. 15:19
겨울의 재료들
안희연
알약,
고요한 잠 속으로 떨어진다
하루가 참 깊구나
시간의 미끄럼틀을 타고
우물,
우물만큼 잠겨 있기 좋은 장소는 없다
이곳엔 웅크린 아이들이 많아
또박또박 슬퍼질 수 있으니까
너는 어느 계절로부터 도망쳐 왔니
너는 참 서늘한 눈빛을 지녔구나
나와 대화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거울을 믿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휘파람,
한 가지 색으로만 이루어진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는 법이니까
번지기 좋은 이름이 되려면 우선
어깨를 가벼이 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지
재봉틀, 이 시간을 모두 기워 입고서
비로소 내가 될 때까지
눈 내리는 밤,
아무도 밟지 않은 페이지를 골라
편지를 쓴다
“내가 그리로 갈게, 꼭 살아서 갈게”
다행일까 호주머니 속에서 손은 계속 자라고 있다
무엇도 쥐어본 적 없는 손이다
ㅡ 《딩아돌하》 2017년 겨울호
안희연 /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