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 南向 (외 1편)/이문재
남향 南向 (외 1편)
이문재
그땐 그 사람이 남쪽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한 문장이 정남향이었습니다
덕분에 한 시절 잘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봄이 이듬해 봄 만나기를 서른 몇 차례
많은 시대가 한꺼번에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오래된 미래는 더 오래가 되었고
온다던 미래는 순식간 지나가 버렸습니다
꽃 진 자리에서 하늘을 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남쪽일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어느 생에게 정남진일 수 있을까요
그때는 여기저기 남쪽이 많았습니다
더불어 함께 남쪽을 바라보던
착하되 강하고 예민하되 늠름한 벗들이
도처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그랬습니다
남쪽은 저기 여전히 맑고 푸르러 드높은데
이 겨울이 봄여름가을을 건너뛰어
다음의 긴 겨울을 만나고 있습니다
처음처럼 처음 같은 마지막처럼
전환 학교
우리는 이야기 속으로 던져진 존재
우리를 키운 것은 9할이 이야기다
이야기를 바꿔야 미래가 달라진다
*
심청이 아빠에게
공양미 삼백 석 영수증을
건네며 말했다
다음엔 아빠가 빠져
*
왼종일 물을 긷던 콩쥐가
팥쥐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우리 가출하자
*
마침내 거북이가 걸음을 멈추고
잠들어 있는 토끼를 깨웠다
토끼야, 바다로 가야겠다
*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가보세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네
⸺계간 《시와 시학》 2021년 봄호, ‘줌인 시인,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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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 1982년 동인지 『시운동』에 참여하며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제국호텔』『지금 여기가 맨 앞』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