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오디/이근화
시낭송행복플러스
2017. 10. 11. 09:14
오디
이근화
가판대에 오디는 검다
바구니마다 탱글거리는데
고요하달지 응큼하달지
두어 개 집어먹으니
손톱 끝이 까매지는데
까매진 손을 어디다 내밀겠어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배가 고프다
아니 부르다고 해야 할까
검은 것은 눈
붉은 것은 입
노란 것은 귀라고 할까
사람들은 반쯤 열려 있어 들어가기 쉽다
튕겨져 나오기 일쑤지만
표정은 제각각
서로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며
활달해진 사람들
오디를 본다
망한 가게는 휑하니 볼 게 없다
수북한 먼지와 찢어질 듯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갈수록 태산이다
기대와 실망이 엉켜 길을 만들고
봉지는 주렁주렁 손가락 사이에 엉킨다
웃는 듯 우는 듯
말없는 이들이
고추를 담고 오이를 쌓고 쪽파를 다듬는다
아직 그 자리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중이었을까
오디라 말하겠지만
숨은 이름들이 더 많다
5월이고
볕이 토해내는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마음은 잠잘 줄 모른다
—《시로 여는 세상》2017년 가을호
이근화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