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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편지 본문

[명시산책]/이서윤 시낭송모음

옥중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편지

시낭송행복플러스 2019. 6. 8. 08:30



옥중아듫 안중근 의사에게 쓴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편지/편지 낭송 이서윤 시낭송행복플러스(시극), 한국명시낭송예술인연합회 





안중근 의사/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사형을 언도받아 1910년 여순 감옥(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실천적인 삶 속에서 민권의식에 철저했고 국가와 민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으며, 민족의 삶을 유린하고 평화를 깨는 무도한 자를 응징했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신앙의 대상이 될 정도로 숭앙을 받고 있다. 그의 생애는 짧았으되 그의 정신은 영원히 전승될 것이다.

안중근은 교양 있는 양반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조용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평온한 삶을 누리고 살았을 것이다. 비록 조선시대에 소외받던 해서지방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는 남다른 집념의 소유자였으며, 새로이 사회가 분화하는 틈을 보고서 그의 앞날을 위해 유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소년 안응칠(安應七, 아명)은 어릴 적 유교교육을 받았으나 차분한 학자적 기질을 지니지는 못한 듯하다. 안응칠은 고리타분한 경서에 빠지기보다는 골목대장 노릇 하는 것을 더 신나했고 사냥에 재미를 붙이며 남아다운 기개를 과시했다. 그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은 봉건체제의 일원이 되기에는 근대 의식이 성장해 있었고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안태훈은 서울의 세도가를 기웃거리다가 결코 자신이 발붙일 곳이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는 근대의식에 접근하는 탐색으로 개화에 관심을 돌리는데, 이것은 양반지주 가문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종교는 민족을 품어야 한다

1894년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안태훈은 새로운 은거지인 신천 청계동을 중심으로 반농민군활동에 나선다. 이것은 어찌 보면 모순된 행동인 것 같지만 반개화를 지향하는 농민군을 반역사세력으로 이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16세의 소년 안응칠도 그 대열에 끼어 활동했다. 이것은 물론 아버지의 활동 탓이다.

그때를 전후해서 그는 서양의 역사를 읽고 서양의 민권사상에 젖었으며 이를 기저로 민족주의적인 애국사상을 지니게 되었다. 골목대장이나 사냥꾼에서 개화청년으로 변신했던 것이요, 천주교도가 되어 성당에 드나들면서 서양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군토벌에 나서 막대한 양곡을 노획했는데, 뒷날 이것이 관미(官米)라며 세도가 민영준이 변상을 요구했다. 안태훈은 관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천주교 교당으로 피신하여 신변보호를 받음과 동시에 양곡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했다.

이것을 ‘양대인자세(洋大人籍勢, 서양 사람의 유세)’라 하는데, 이때 안중근은 천주교의 실체를 보았다. 안태훈은 그 뒤 청계동에 성당을 세워 깊은 신앙심을 보였다. 비록 뒷날이기는 하나 청년 안중근도 국가대세를 위해 천주교의 민주교(閔主敎, 프랑스인)라 불리는 뮤텔에게 대학설립을 건의했다. 뮤텔은 이 건의를 거절했다.

“만일 조선사람이 학문을 하게 되면 교인들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논의를 꺼내지 마시오.” 이 말에 안중근은 극도로 분개했다.

“천주교는 믿으나 외국인의 심성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앞으로 프랑스 종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안중근은 신부를 비난하고 그동안 해오던 프랑스말 공부를 중단했다.

안중근은 새 신앙관이 확립되면서 천주교를 통한 민권투쟁에도 눈을 뜨게 된다. 곧 황해도 천주교도를 중심으로 관리의 수탈과 탄압에 항거하거나 충돌하는 일들이 일어났는데 안중근은 “천주교의 민권투쟁 사례를 통해 정부를 개혁하고 당당한 문명독립국을 이룩하여 민권의 자유를 얻으려는 개혁의지를 뚜렷이 형성시킬 수 있다.”(윤경로 《한국근대사의 기독교사적 이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이어 안중근은 을사조약이라는 나라의 비운을 겪게 된다. 이에 따라 그의 운동방향도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는 국권회복운동을 구체화시켜 나간다. 그는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두 곳의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진 국채(國債, 나라 빚) 갚는 일이 일단 예속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여기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온건한 노선이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07년 이른바 정미7조약으로 내정마저 넘어가자 그의 개인적 기개도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는 의병을 통한 무력투쟁 이외의 방법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안중근은 활동기지를 옮기는 최후의 방법을 강구해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갔다.

그는 이곳에서 의병의 연장선상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무기를 확보하여 의병부대의 우군령장(右軍領將)이라는 직함을 갖고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그의 부대는 국경의 경흥으로 진출했으나 일본군 척후병 네 명을 사살하는 전과에 그치고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그의 좌절감은 극도에 달했다. 그 책임을 전가하기에 앞서 심한 자책감에 빠졌다. 그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불신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안중근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당시 애국청년 사이에 유행하던 단지동맹(斷指同盟) 결성이다. 이동휘의 지도를 받으면서 안중근을 맹주로 하여 12명의 청년이 모여 왼쪽 무명지를 절단하고 독립항쟁을 벌이기로 맹세한 것이다. 이들은 집단적 항쟁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상황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사실은 무명지가 끊어진 안중근의 손도장을 통해 선명히 접할 수 있다.

단지동맹의 약속에 따라 안중근은 순전히 개인적 조직력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에 나서서 끝내 이를 성공시켰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정거장의 일대 저격사건은 우리 식민지 역사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토의 죄목을 15가지로 나누어 지적했는데, 그 중에 동양평화를 교란시킨 일과 일본 및 세계를 기만한 일이 들어 있다.

그는 천주교 신도로 한 개인을 살해하는 것이 교리에 어긋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개인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유린하고 동양평화를 깼으며 최소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세계의 민권운동가를 기만한 장본인을 응징하고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임을 천명했다.

이토는 한국을 침략하여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다음 정권을 손아귀에 쥐고서 황제를 폐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철도, 광산, 산림, 천택(川澤)을 빼앗았으며 관청으로 쓰던 집과 민간의 큰 집들을 병참이라는 핑계로 모조리 빼앗고 기름진 전답과 오랜 묘소들도 군용지라는 푯말을 꽂고······

안중근은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들면서 대한민국의 의병참모 중군의 자격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서 그의 깊은 사려와 논리의 정당성을 발견하게 된다.

안중근의 유언

안중근은 이토의 15개 죄목을 낱낱이 외치며 저격한 탓으로 일본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순국하기 전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이 빌렘 신부와 동생 정근, 공근을 만나 유언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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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청년의 표상

그의 독립사상과 침략배척의 논리를 요약해보자.

첫째는 독립전쟁론이다. 이것은 의병항쟁과 연결된다. 의병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근왕병적 성격에서 벗어나 있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그는 철저하지는 못한 것 같으나 민족의식과 민권의식을 이면에 깐 일종의 민중의병론의 성격을 품고 있다. 그는 이토 살해가 ‘산하 삼천리 삼천만 동포를 위한 희생’이라고 했다. 그는 민영환의 순국은 충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죽는 것이어서 국가에 무익한 행동이었다는 견해를 보인다.

한편 계몽운동 또는 교육운동은 자칫 역량의 분산을 가져오기 쉬우므로 종합적이고 효과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바탕에서 독립전쟁론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을 메고 칼을 차고 일제히 의거를 일으켜 이기고 지는 것과 잘 싸우고 못 싸우고는 돌아볼 것 없이 통쾌한 싸움 한바탕으로써 천하 후세의 부끄러운 웃음거리는 면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같이 애써 싸우기만 하면 세계열강의 공론도 없지 않을 것이라 독립할 수 있는 희망도 있을 겁니다.

이는 소박한 논리로 치부될 수도 있으나 기회론과 함께 세계의 지원을 기대하는 자력 근거를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러시아망명 이후에 보여준 행동의 귀결이었다.

둘째, 동양평화론이다. 그는 이토를 죽인 것도 동양평화를 위한 일련의 일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조선과 청국이 서로 협조하면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 병합은 이를 깨는 것이다. 서방동점(西方東漸)의 기운 속에서 동양평화를 유지하며 이에 공동대처하여 황인(黃人)의 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일본을 맹주로 한다’고 일본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 특이하고, 또 서구 제국주의의 실상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일본이 동양평화를 깬 탓으로 러시아와 청나라 양국이 일본을 향해 다시 싸우려는 형세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미국도 일본의 발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까지 이어간다. 그는 분명한 자기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는 결코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안중근은 한국 청년의 표상이니 만큼 오늘날 좀더 그에 대한 종합적 연구와 선양사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인 가운데에서도 존경해 마지않는 인사들이 많다. 그는 헛된 애국자의 이름을 얻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안중근의 유묵

애국청년 사이에 유행하던 단지동맹은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안중근의 손도장은 그의 독립투쟁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내용 다음 백과사전-




   


   2016 서울시 차없는 날 공모작(출품 이서윤)공연/ 안중근의사 시단막극 공연(조마리아 여사 편지, 낭송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