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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2021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길찾기/ 김진환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2021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길찾기/ 김진환

시낭송행복플러스 2021. 1. 12. 15:50

[2021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길찾기 / 김진환

 

차창 너머 낯선 가게들

잠시 눈 감은 사이에

내릴 정류장을 지나쳤나

인터넷 지도로 확인한다

버스의 노선과 파란 점의 위치를

 

나는 길 잃지 않았다

인터넷 지도에 따르면

이 길은 내가 아는 길

매일같이 지나는 왕복4차로

 

거기서 나는 흰색과 붉은색 보도블록의 배열을 배웠고

넘어져 뒹굴며 무릎으로 손바닥으로 아스팔트를 읽었는데

 

보도블록의 배열이 다르다

아스팔트의 굴곡이 다르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한다

버스가 정거장 몇 개를 지나는 사이

파란 점은 아직도 아까 그 길에 있다

 

멀리 손 뻗어 손바닥의 살점 패인 자리를 보면

핏기와 죽은 피부의 흰빛이 구분되지 않는데

 

하차 벨 소리가 울린다

흰 버튼 위로 붉은 등이 들어와 있다

뒷좌석 사람이 내 뻗은 팔을 보고

대신 눌러 주었다며 손짓한다

 

버스에서 내려 아스팔트를 만져본다

인터넷 지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거나

거기로 이어지는 길

걷다 보면 낯익은 가게들도 보일 것이다

 

 

 

 

김진환

△1996년 용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공 재학

 

[2021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소감

시인으로 거듭남…제 마음에 달려 있을 터

 

학기의 마지막 과제를 남겨두고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반가운 한편으로 겁이 났습니다.


저는 언제나 학생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시를 안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습니다. 김근 시인께 질문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시는 어떻게 쓰는 거지요?” 선생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답하셨습니다. “선생님도 모른다.”

시를 모르고 시를 썼습니다. 매번 새롭게 배우면서, 제게는 시작(詩作)의 아무런 토대도 없는 것처럼, 언젠가는 저만의 미학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상상하며, 그런 날에는 등단하지 않아도 스스로 시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시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시인으로 낯을 들어도 좋을까? 하루를 꼬박 고민하고 결심했습니다. 제게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이 소식을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습니다.

 

오래도록 저를 학생에 붙잡아둔 것이 제 마음이었듯이, 시인으로 거듭남도 제 마음에 달려 있을 겁니다. 더는 학생에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학생의 마음을 버릴 수 없다면 학생의 마음으로 시를 쓰겠습니다. 제 언어를 스스로 책임질 수만 있다면, 그런 시인이 있어도 좋겠지요.

시는 느린 언어라고 믿습니다. 그 언어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느리게 들여다보면 시는 그 안에서 느리게 느리게, 자꾸 무엇을 보여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 오늘 참 많이 했군요. 제가 시를 믿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인가 봅니다. 텍스트 안팎으로 움직이며 다채로운 감각을 자아내는 언어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언어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가 사람들의 믿음과 함께 읽히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까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도해주신 선생님들과 서로 응원하고 있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문우들, 곁을 지켜준 가족들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더 많이 망설였을 겁니다. 아울러 부족한 시를 눈여겨봐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021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문화사적 맥락 속 독창적인 목소리 확보

 

 

 

 

심사위원 임동확(시인)

 

양보할 수 없는 시의 미학적 규범의 하나가 상투성과의 싸움이다. 어디서 한번은 본 듯한 기계적인 언어의 조합이나 문장, 누구나 알 수 있는 흔해빠진 생각과 당연시해온 사회적 통념과의 치열한 대결이 개성적인 작품 탄생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지 않는 작품들은 이미 누군가 힘들여 개척해 놓은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는, 그러나 결국엔 모방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 아류작亞流作에 불과하다. 무한히 사본을 뽑아낼 수 있는 사진의 음화陰畵를 의미하는 ‘클리세’ 내지 복사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코로나 정국으로 인한 우울하고 답답한 시대상황 탓일까? 막연한 불안과 절망 의식, 실업과 빈곤 등의 주제나 소재가 다수를 차지하는 응모작들을 보면서 소감 중의 하나가 그렇다. 각자 절실하고 소중한 주제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미 공유된 명백한 사실들이나 타성화된 담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그 표현방식이 이미 한국시의 스테레오 타입화된 기성 시인들의 어법을 닮아있다는 것은 유감이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경향 각지의 응모자가 보내온 1129편의 시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 심사자는 김재언의 ‘물 저울’ 외 4편, 정두섭의 ‘가족의 탄생’ 외 5편, 황명희의 ‘황금냄비’ 외 4편, 장윤덕 ‘그늘의 역사’ 외 4편, 김진환의 ‘길찾기’ 외 5편 등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응모작들 모두 다행히 그런 상투성의 혐의(?)를 슬기롭게 피해가고 있다. 특히 이들 작품들은 언어를 필요 이상으로 학대하거나 당대 사회의 관습이나 윤리도덕을 의심 없이 추종하는 데서 오는 감상적인 휴머니즘 차원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심사자가 최종 심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장윤덕과 김진환의 시들이었다. 그리고 장윤덕의 경우, 유장한 리듬과 활달한 문장 전개 속에서 펼쳐 보이는 시대정신과 민중의식이 여느 기성 시인 못지않은 시력(詩歷)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심사자는 결국 섬세한 관찰력과 그에 바탕한 정치(精緻)한 시적 패턴 읽기에 기반하고 있는 김진환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일견 소박하게 보이나 막강한 힘으로 군림하는 시적 영향이나 생각의 통속성을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바로 자신만의 세상읽기와 사유를 정직하게 펼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당선작으로 뽑은 김진환의 ‘길찾기’는 길 찾기 맵과 실재, 인터넷 지도와 실제 삶 사이의 괴리에 대한 설득력 있는 알레고리화를 통해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필요 이상 시적 장식이나 세련된 수사의 남용보다 자신의 체험과 그 영향에 대한 성실한 반성 및 성찰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삶의 감각과 실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비둘기 낙서’와 더불어 당선작은 이미 진부해진 기존의 생각이나 문체들을 자기 것 인양 포장하기보다 그것들을 시대적이고 문화사적인 맥락 속에서 저만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확보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5명의 응모작들은 여느 문학매체들에 응모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수작들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아쉽게 당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예비시인들에게도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특별히 당선자에겐 늘 정진하는 시인의 한 명으로 오래 한국시단에 기억되길 바라면서 축하의 꽃다발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