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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박규현 본문
詩 당선작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세상 떠난 친구 생각하며 쓴 시, 당선 소식에 하염없이 눈물만…"
2022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인 박규현 씨는 “한 시기를 같이 통과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감각을 시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김영우 기자
2022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인 박규현 씨(26)는 당선 전화를 받고 “눈물이 났다”고 했다. 기쁨의 눈물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굉장히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다시는 시를 못 쓸 거라고 생각했죠. 친구를 생각하며 애도하는 마음으로 쓴 이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얘기를 듣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어요.”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는 심사위원들로부터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을 받았다. 랭보처럼 박씨의 시에서도 자폐적이고 착란적인 면모가 엿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씨의 시는 문장의 뜻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처음 읽을 땐 고개를 갸웃하지만, 그래서 두세 번 다시 읽게 하는 힘이 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그는 문예창작과만 거의 10년째다. 안양예고 문예창작과와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좋아하는 글쓰기를 대학에서도 할 수 있게 됐지만 고민은 깊어졌다. “고등학교 땐 대학 입시란 목표가 있다 보니 무엇을 써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있었어요. 대학 입학 후엔 내가 시로 말하고 싶은 게 뭘까, 오히려 길을 잃었죠. 어느 순간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자고요. 제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요.”
심사위원들이 그의 시에서 ‘착란적 비약’이 도드라진다고 했지만 난해함과는 또 다르다. 혼자만의 시가 아닌, 누군가에게 읽히고 이해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하는 그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제 취향은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이라며 “구조가 다층적일 순 있지만 메시지 자체는 하나를 직관적으로 얘기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가 그런 예다. 리치는 세 아이의 엄마였고, 유대인이었고, 레즈비언이었다. 박씨는 “리치의 시는 읽을 때마다 넘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힘있게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게 좋고, 나도 그런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또 강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장면을 그리기’다.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에서 파쇄기로 들어간 종이는 흰 가루로 변하고, 이는 다시 눈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박씨는 “지난겨울 아르바이트 하던 사무실에서 서류를 파쇄하곤 했다”며 “그때 느꼈던 무력감 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예지 본심에 몇 번 오르긴 했지만 신춘문예에 지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고정관념일 수 있는데 신춘문예와 제 스타일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그에게 시란 뭘까. 박씨는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였던 김연아 선수의 말을 빌렸다. “김연아 선수가 무슨 생각을 하며 스트레칭을 하느냐는 질문에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고 답했어요. 저도 시를 쓰는 게 이제는 그냥 하는 것 같아요. 삶의 자장 속에 깊이 들어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제 생활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박씨는 오래오래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한 시기를 같이 통과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감각을 시로 쓰고 싶어요. 나와 비슷한 또래들이,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있구나 하고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게요.”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
심사평
황지우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김이듬 시인
왼쪽부터 손택수·황지우·김이듬 시인.2022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박서령의 ‘재수강’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박언주의 ‘도둑 잡기’에서는 생존과 죽음,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임원묵의 ‘새와 램프’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만장일치로 박규현의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읽는 줄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흡입력에 놀랐다. 이어질 수 없는 문장과 문장들의 연접을 통한 긴장감, 착란적 비약, 예상을 건너뛰는 불연속성에도 다 읽고 나면 이미지가 선연히 발생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상의 가치를 애써 찾아가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있어요/내일과 같이 여전히’라고 기록하는 시. 간신히 발설하는 이 미세한 약음이야말로 거대 담론이나 외치는 소리보다 시적 울림이 크다는 것을, 시는 ‘침묵하기’와 ‘겨우 말하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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