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좋은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시 창작 이론자료

좋은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시낭송행복플러스 2016. 1. 22. 16:15



좋은 시의 조건, 10 가지 

                                             박남희 (시인 · 문학평론가)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동화 - 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 -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 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최문자「팽이」전문

  


2. 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좋은 시는 시인이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미 너무나도 낯익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어서 낯익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처럼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을 일깨워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해내는 자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대상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바라보고 이것을 자신의 표현법으로 낯설고 새롭게 표현해 내는 데서 생겨난다.

이처럼 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주제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유(생각)를 통해서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우리 시문학사를 더듬어 볼 때, 실험시나 해체시가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시적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분열된 몽고의 부족을 결집하여 중국과 유럽을 정복한 징기스칸이 만약에 유목민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큰 역사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nomad/nomade)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철학의 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목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노마드적인 정신으로 시를 쓸 때도 필요하다. 좋은 시를 쓰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을 부수고 자아와 사물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에서나오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좋은 시의 원천이 된다.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럭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물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발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 조말선「둥근 발작」전문 

  

3. 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가 않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관념도 시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사물화하지 못하면 독해가 불가능한 난해시나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시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연관성이 아주 없거나 너무 희박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객관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시가 종종 보이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한 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는 체험과 기억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경험이나 감동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 줄 수 있는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나 주제가 현실과 일정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이나 상상력, 시적 사유 등이 현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생각이나 상상력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시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감각의 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 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 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
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 문인수「간통」전문



4. 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시를 쓰다보면 처음과 끝의 발상이나 주제가 다르고 형식적인 통일성도 없이 산만하게 시가 써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오는 초보자일수록 더욱 자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작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에 대한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처음 읽을 때는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꼼꼼히 읽어보면 낯선 표현 속에서 일정한 시적 문맥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들은 시 속에 텐션(긴장)이 들어있어서 시를 읽는 맛이 새로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중적 구조를 지닌 다층시와 독해 불가능한 난해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결여되고 내용과 형식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는 난해시라기보다는 미숙한 시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쓴 자신도 설명 불가능한 난해시도 역시 시적 숙련도가 덜된 시에 포함된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난해시나 환상시, 해체시의 포즈를 취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난해시로 빠져 들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식들이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있는 네트워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독 시만이 소통불가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좋은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경험과 상상력, 자유로움과 질서, 모호성과 선명성, 자아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 이덕규「풍향계」전문


5. 장식적인수사를피하고명징한이미지와행간의미학에유념하라 


시만큼 언어적 수사에 민감한 장르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에서 언어적 수사는 옷과 같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보이듯이, 시 또한 수사적 표현에 따라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옷이 모든 사람의 몸에 맞는 것이 아니듯이 불필요한 장식적인 수사법이 때로는 그 시를 망칠 때가 있다. 시에서는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오히려 명징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그 시의 구심점이 되어서 단순한 주제를 중의적으로 전경화 시켜준다. 대부분의 좋은 시에는 명징한 중심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시는 그러한 중심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체험과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간접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설명에 갇히기 쉬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시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산문적 진술은 화자가 대부분의 상황을 직접 진술하기 때문에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이 없다. 하지만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시적 긴장감은 시적 화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행간 사이에 무수히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급 독자는 시인이 설명하지 않고 행간 사이에 감추어 놓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시의 묘미를 느낀다. 압축과 생략이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 유인서「꽃 먼저 와서」전문


6. 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시의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아스팔트길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의 길은 오히려 꾸불꾸불한 시골길이나 출렁이는 물길과 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눈에 빤히 보이거나 쉽게 측량되지 않는다. 현대화된 길은 이미 계획된 설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지만 시골길이나 물길은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시의 길 역시 자연에 가까운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시는 친자연적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계획된 논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씌어진 시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풍부한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빤한 알레고리 시에 머물거나, 머리로 쓴 작위적인 시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논리적인 시는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다. 물길은 늘 요동하면서 수시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도 물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마음은 물길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계산된 논리를 버리고 시상을 자유로운 연상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연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숨어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이러한 숨어있는 상상력을 캐내어 자아와 타자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중심적인 주제나 이미지로 응집시켜나가는 것이다. 상상력이 깊고 넓은 시는 바다와 같은 심오함이 있다. 작은 냇물은 가뭄에 말라서 없어지지만 바다는 죽지 않는다. 바다 속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시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 박현수「시작법을 위한 기도」전문


7. 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시는 시인이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이는 1930년대 박용철로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는 유기체시론의 맥락에서 시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에이브람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론과 존재론의 범주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격동기나 시대적 전형기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 속의 시들은 교훈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종교시와 연시(연애시), 행사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런 시들은 시 자체가 존재성보다는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시가 사용되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간적 흐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경우가 많아. 따라서 문학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론적인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존재론적인 시란 어떤 관념이나 생각도 배제하고 오직 시 자체의 존재성만 추구한 김춘수류의 무의미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의미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문학 외적인 목적성에 치우친 시는 순수한 의미의 존재론적인 시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물론 문학 속에도 종교나 철학이 들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학의 본령은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있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아름다움은 형태적 아름다움 이라기보다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시 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율을 느낀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다. 현대시의 낯선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느끼기보다는 직관으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내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뱃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 메클리시「시학」부분




8. 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자연은 생명의 터전이고 원천이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고 생멸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닮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의 여러 사물들이 둥근 것이나, 부서져서 다른 것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답고 싶어 하는 것이나,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몸에도 둥근 것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닮아 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자연을 등장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친연성親緣性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 역시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시는 비유적 언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비유의 원천인 자연을 배제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근원이며 시적 소재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초보자들이 종종 남의 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 속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말의 광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인간을 보면 자연이 보인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든, 그 반대이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창조이다.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 강은교「아주 오래된 이야기」전문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의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 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것,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 위선환「지평선」전문 

  
10. 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흔히 문체라고 하면 소설의 문체를 떠올리지만 시에서도 엄연히 문체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7.5조의 운율을 보여주는 김소월의 시나, 평북 방언을 중심으로 전감어린 산문시적 회고체의 시형을 보여주는 백석의 시는 물론, 서정적 울림이 큰 반복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정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태준이나, 주로 개인적인 의식 세계를 분열적이고 도착적인 어법으로 유니크하게 보여주는 황병승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체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의 문체들을 유형화시켜서 종류별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문체는 언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문체는 산문의 문체와는 달리 시 문맥의 이차적인 의미에 기여하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의미나 상상력을 다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문체는 시인의 어법이나 운율만으로는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의 문체는 상상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 내는데 기여한다. 그것이 서정적 공간인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해체적 공간인지, 환상적 공간인지, 현실적 공간인지는 시인의 문체와 상상력의 유기적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문체는 시인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정한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의 문체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서는 안된다. 옥타비오 파스는『활과 리라』에서 "스타일(문체)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지만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시인의 스타일이 관습화되면 더이상 그것은 독특한 스타일이 될 수 없다는 경계의 말로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시적 개성을 강조하다보면 보편성이 약해져서 자칫 난해 시에 빠질 우려가 있고, 반대로 보편성에 치우치다보면 통속성과 대중성에 영합하는 몰개성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적 언어는 산문적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 그곳은 시인 각자의 상상적 공간이다. 산문이 낮의 공간에 적합한 것이라면 시는 밤의 공간에 더 어울린다. 밤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빛을 숨기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 문태준「묽다」전문



박남희/경기 고양에서 출생했으며, 숭실대 국문과 및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가 있으며,

평론집으로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 현재 '시산맥' 주간, '창작 21' 편집위원, 고려대와 숭실대 강사,

일산문화학교 시창작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