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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장석남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시가 있는 하루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장석남

시낭송행복플러스 2019. 6. 24. 06:10



장석남의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감상 / 이경호, 손택수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장석남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 저 혓자국!

나는 그곳의 낮아지는 저녁해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

 

저만치 바람에

그늘이 시큰대고

무릎이 시큰대고

적산가옥

청춘의 주소 위를 할퀴며

흙탕물의 구름이 지나간다

 

, 마음을 핥는 문밖 마음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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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에서 하동 화계로 넘어가는 19번 국도를 따라서 흐르는 섬진강은 4월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낸다. 가로수로 이어진 벚꽃의 흐드러진 개화와 눈보라처럼 휘날리는 낙화. 그 낙화 사이로 햇빛에 뒤채는 섬진강의 은빛 물비늘. 그것들을 시선으로 품으며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는 마음의 주소는 세상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을 것이다.
   하동에서 섬진강 너머 구례 강둑의 연둣빛 들판에 방목되어 있는 소떼. 상처 입은 청춘의 시선에는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주는 모습과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의 풍경이 유독 하나로 겹쳐진다. 그것들은 몸을 따뜻하게 “핥아”주는 체온으로 마음의 상처와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청춘의 시인은 “아, 저 혓자국!”이라고 외친다. 모성과 자연의 어울림이 빚어내는 ‘사랑의 치유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도시문명으로부터 상처 입은 청춘의 마음도 그런 “혓자국”, 그런 ‘사랑의 치유법’을 체험하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그는 황혼의 따뜻한 “혓자국”에 “마음을 내어 말”리는 방법을 찾아낸다.
   4월은 재난으로 질주하는 문명의 충격에 “시큰대”는 삶의 “무릎”을, 지칠 줄 모르는 도시생활의 탐욕에 “할퀴”는 영혼의 “무릎”을 감싸주고 치유해주는 자연의 풍경을 찾아 나설 때다. 섬진강 남도 기행은 단지 눈요깃감으로서의 벚꽃 축제가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을 체험하고 기리는 벚꽃축제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지친 “마음을 핥는 문밖 마음”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경호 (문학평론가)


 

빨래는 한낮의 따가운 볕에 잘 마르겠지만 마음은 열기가 꺾인 저녁 해라야 더 잘 마른다. 이글대는 불에 마음을 그대로 말렸다간 그을려 까맣게 타버리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같은 불이라도 기울어 사납지 않고 다감한 몽상의 불이다. 이 다감한 불의 이미지가 저녁의 시간대를 부르고 노을빛을 닮은 소를 부른다. 이삭 핀 보리의 따가움이 부드럽게 다가오는 것도 송아지 등을 핥는 어미소가 있어서다. 저녁해와 어미소와 보리밭을 불어가는 바람이 흙탕물에 할퀸 마음을 핥아준다. 이 불은 그러니까 '젖은 불'이다. 나는 젖음으로서 마른다는, 고통을 마주함으로써 치유된다는 역설이 이미지의 역동적 힘에 의해 가능해졌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마을을 핥는 문밖 마음'이 있었다는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손택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