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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2021 한경 신춘문예] 유실수(有實樹) / 차원선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2021 한경 신춘문예] 유실수(有實樹) / 차원선

시낭송행복플러스 2021. 1. 12. 15:04

게시글 본문내용

 

 

[2021 한경 신춘문예] 유실수(有實樹) / 차원선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2021 한경 신춘문예] "나만의 시선으로 본 삶의 단면들…새로운 방향으로 보여주고 싶다"

 

“불과 2016년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신춘문예 도전 세 번 만에 당선될 줄은 몰랐어요. 이제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세상으로 들어가 사회문제나 세상과의 연대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2021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 ‘유실수’로 당선된 차원선 씨(28·본명 고보경)는 “지난 5년간 남몰래 시를 써 왔지만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이방인 같다고 느꼈는데 이제야 당당하게 ‘시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차씨는 예술대학에서 클래식 음악을 만들고 공부하는 작곡과를 졸업했다. 4년 내내 문학과는 무관한 공부를 했지만 졸업할 즈음부터 머리에 떠오르는 단상을 시로 하나씩 끄적여왔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16년 2월 대학 졸업 후부터였다. 처음엔 ‘나도 시라는 걸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우연히 황인찬 시인의 시 특강을 들었던 차씨는 황 시인으로부터 시에 대한 많은 조언을 들으며 시의 완성도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

 

“수업을 들으며 시인의 묘사가 읽는 사람과는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시 안에서 서로 대화하는 걸 넣는 습관이 있는데 황 시인은 그런 시구들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앞뒤 상황이나 단편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시적으로 어떻게 연결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줬죠.”

 

이후 문학 플랫폼 ‘던전’에 여태껏 써온 시를 올리며 사람들의 평가를 받았다. 그곳에 연재함으로써 시를 쓰는 데 큰 힘을 얻었다.

 

“그렇게 5년 정도 지나니 자연스럽게 시들이 쌓였어요. 퇴고하면서 시를 더 배워보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내 시를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더라고요.”

 

그는 대학 졸업 당시 취득한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을 바탕으로 ‘예술가 교사(TA·teaching artist)’로 일하고 있다. TA는 연극, 시각예술, 무용, 음악, 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통합예술교육과 인문예술교육을 하는 교사다. 대학 졸업 직후 서울맹학교에서 1년 정도 맹아(盲兒)들을 가르치며 교육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다.

 

문화예술 교육을 더 공부하고 싶어 지난해 하반기엔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들어갔다. 현재 문화학 중 문화매개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차씨는 “스스로를 ‘예술가 교사’로 소개한다”며 “시를 쓰는 것 역시 음악도 가르치지만 창작도 하는,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차씨의 당선작 외 네 편은 뭔가 힘주지 않은 자연스러움, 시적 참신함이 돋보였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이전에 썼던 시들이 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시가 많았던 데 비해 이번 출품작들은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했던 시였어요. 퇴고하는 과정에서 제가 나타내고자 하는 관계와 읽는 사람이 느끼는 관계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걸 많이 인식했죠. 특히 묘사하는 대상이 너무 가깝게도, 너무 먼 존재로도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빼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만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막 시인으로 출발하는 그에게 시란 어떤 존재였을까. “버팀목이었어요. 일을 하고 돌아와서 혼자 있을 때 뭔가에 몰입해 저 자신에게 100% 집중해 쏟아낼 수 있는 것 자체가 제겐 회복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죠. 시를 처음 썼을 땐 뭔가 토해낸다는 마음으로 제 상처를 써내려갔는데, 이젠 시를 배워 가고 시어를 정제하는 과정이 스스로를 정제해주고 있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을까. “제가 기본적으로 실존하는 삶에 가까운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어요. 우리 도처에 있는 삶의 단면들을 저만의 시선으로 보고 경험해 새로운 방향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심사평

황인숙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장이지 시인·제주대 국문과 교수

 

손택수(왼쪽부터)·황인숙·장이지 시인

 

본심에서는 네 분의 시를 다뤘다. ‘전래동화’ 외 네 편은 직설적인 언어로 기성세대와 맞서는 자세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것이 사회와 깊이 부대껴서 얻은 것은 아니어서 시야가 좁고 다소 막연해 보였다. ‘가장 내밀한 스펙트럼’ 외 네 편은 흡입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에서 흐름을 끊는 직접 발화를 자주 사용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어둠’ 외 네 편은 과감한 생략과 거침없는 반복 등 난숙한 화법으로 이목을 끌었다. 다만 논리가 시를 압도하는 지점이 가끔 눈에 띄었고, 최근 시의 스타일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침윤된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도 받았다. ‘유실수’ 외 네 편은 각각의 시마다 이미지를 극적으로 쌓아가면서 심화시켜 가는 상상력이 돋보였다. 본 적 없는 기교와 비약이지만 우리는 이 상실에 맞닥뜨린 자의 눈에 비친 낯설고 속절없이 슬픈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실수’ 외 네 편을 응모한 차원선 씨를 당선자로 정했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우리는 차씨가 익숙한 새로움을 되풀이하기보다 낯선 전환점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