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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향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 윤혜지 ‘노이즈 캔슬링’ 본문
2021 경향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 윤혜지 ‘노이즈 캔슬링’
[2021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작 - 윤혜지 ‘노이즈 캔슬링’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우리는 한껏 미세해진 우리를 내려다보며 기내식을 먹었다 책을 뒤적거렸다 구식(舊式) 동물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그것은 동물들이 있다,로 시작된다
유기인지 실종인지 자연발생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구식의 동물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은 제각기 살고 있다
매일 똑같은 구절을 읽어줘도 너는 언제나 놀라워한다
연하게 와서 끊임없이 훼손되는 마음으로
침목(枕木)을 고른 적이 있다 비를 맞고 볕을 쪼이길 반복한 나무토막들 위로 뜨거운 기차가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추면 아웃렛에 가서 새 셔츠를 사고 카페에 앉아 아주 뜨겁고 단맛이 나는 차를 마셔야지 하다가 자신이 데려올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영영 잊어버린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소음으로 소음을 지워내는 방식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각자 잊어버린 것을 접어올리고 등받이를 세우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렸다
가팔라지는 날개
여러 개의 의자에 앉아야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국의 빛과 온도
잎사귀와 해변의 선량한 사람들
규칙적인 것은 예상 가능해서 지울 수 있다 다만 어떤 통화 소리
바빠, 계속 바빠서 그래 배회하듯 하는 사과
그것은 틈입이다
나 좀 안아줘, 같은 말은 꼭 돌아누우면서 하는
어떤 나쁨은 너무 구체적이어서
꼭 대낮 같다
물결이 물결로
공들여 썩는 냄새를 맡았다
그것을 생각할 때
깨끗한 공기 속으로 무언가 빠르게 나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서 파도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계단처럼
[2021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소감 - 내 안팎 드나들며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글을 쓰면 종종 “시적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시적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서 아예 시를 써봤는데 생각보다 잘 맞았다. 마음속에서 덜컥거리는 것, 어두운 것들을 꺼내 썼다. 흐릿하게 써도 되니까. 모호하게 써놓고 시라고 이름 붙이면 되는 줄 알던 때도 있었다.
가던 길의 방향을 틀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친구들과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 스터디원들에게 감사하다. ‘지금-여기의 시 쓰기’ 친구들이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에게도 고맙다. 동생들과 아빠, 그리고 엄마. 나는 자주 엄마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만삭의 몸으로 백일장에서 가을 강을 바라보며 글을 쓴 이야기. 상으로 받은 세계문학 전집을 들고 퇴근한 남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듣고 있으면 그 어린 부부와 내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가, 이내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진다. 그러니까 이 상은 사랑하는 당신과 내가 함께 받는 두 번째 상이다.
삶은 계속 모호하겠지만, 정확한 시를 쓰고 싶다. 또 다른 시를 꿈꿀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린다. 이제 내 안팎을 유연하게 드나들면서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준 사람들과 닮은 글을 쓰고 싶다.
마지막으로 허술하고 이상한 나를 견뎌준 동윤에게 많이, 깊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윤혜지 △1984년생.
[2021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심사평 - 가능하면 오래, 더 가까이서 듣고 싶은 목소리입력 : 2020.12.31 19:51 수정 : 2020.12.31 19:
지난 8일 김현, 김행숙, 신용목 시인(왼쪽부터)이 시 부문 심사를 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시가 고백의 장르라면 당연히 그 내용보다 방법이 중요할 것이다. 아무리 전언이 분명하고 어조가 강렬해도, 나와 당신 사이 징검돌을 하나하나 밟아오지 않는다면 금방 무용해지는 게 고백이니까. 이제 바위처럼 던져져 이 세계의 진의를 되묻는 식의 ‘낯익은 새로움’보다도, 무심하게 놓인 돌의 모양과 간격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존재를 확인한다. 물론 징검다리 이편과 저편에 있는 ‘나와 당신’을 ‘세계와 언어’ 또는 ‘삶과 시’로 바꾸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최종까지 함께 읽은 시는 그렇게 서로를 건네주는 것들이었다. 여한솔의 시가 시간을 견디는 슬픔을 연구실 불빛으로 켜놓는 저력을 보여줄 때도, 박다래의 시가 낯익은 순간의 낯섦을 비닐하우스의 물방울로 달아놓을 때도 그랬다. 전윤호가 사물과 세계를 빈틈없이 연결하고 정보영이 존재의 물질성을 생의 실감으로 드러낼 때, 우리는 이 시대의 고립을 단순히 고독의 심연을 헤매는 일로 소진하지 않고 세계의 이면을 파헤치는 힘으로 돌려놓는 데 놀라워했다.
윤혜지의 ‘노이즈 캔슬링’에는 기차 소리로 달려가는 지상의 시간이 있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공중의 시간이 있다. 날아가는 동안, 우리는 자신들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시는 부유와 진공이 꼭 공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결처럼 규칙적으로 이어지던 관계가 대낮의 파도처럼 무너질 때, 일상의 비애를 지워내는 것 또한 일상이고 그것이 진짜 비극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흔한 구식(舊式)의 삶을 일깨우는 것이 유일한 미덕이었다면 이 시를 내려놓고 각자의 비애 속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든 것은 그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실어나르는 목소리였다. 숨기지도,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으며 이어짐과 멈춤의 무심한 굴절을 만들어내는 매혹 앞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구식(舊式) 동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면 어떨까. 가능하면 오래, 그리고 더 가까이서 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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