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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멸치- 김기택

시낭송행복플러스 2015. 3. 17. 01:41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海溢)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졌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김기택 시인/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들을 펴냈다. 어린이를 위한 책으로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 [방귀]를 썼으며, 외국 동화 [용감무쌍 염소 삼형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고양이 폭풍] 들을 한국어로 옮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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