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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의음(擬音)의 전통/김종삼 본문
의음(擬音)의 전통
김종삼
오래인 한도표(限度表)의 정둔(停屯)된 밖으로는
주간(晝間)을 가는 성하(星河)의 흐름 속을 가며
오는 구김살이 희박(稀薄)하였다.
모호한 빛발이
쏟아지는 수효와의 역(驛)라인이
엉키어 영겁(永劫)의 현재라는 길이
열리어 지기 전(前)
고집(固執)되는 야수(夜水)의 그늘이 되었던
얕이한 집들, 울타리였다.
분만(分娩)되는
뜨짓한 두려움에서
영겁(永劫)의 현재 라는
내부(內部)가 비인
하늘이 가는
납덩어리들의......
있다는 신(神)의 묵수(墨守)는
차츰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김종삼(金宗三, 1921∼1984)/ 1921년 3월 황해도 운율에서 아버지 김서영과 어머니 김신애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장남이 시인 김종문).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했다. 1937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7세 되던 1938년, 도쿄 도요시마상업학교에 편입학해, 1940년 졸업한다. 그의 일본 유학은 부모나 주위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작곡을 하고 싶어 자의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의 시와 삶에서 클래식 음악이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한 것도 이때의 결심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1942년 그가 도쿄문화학원 문학과에 들어가자, 법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하길 원하던 아버지가 지원을 끊어 버렸다. 이때부터 1945년 해방되어 귀국할 때까지 신문팔이, 부두 하역부 등 막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문화학원 문학과는 1944년 중퇴했지만, 이 시기 그는 도스토옙스키, 바이런, 하이네, 발레리 등을 탐독하는 한편 클래식 음악에도 심취했다. 막노동을 하면서도 서양 예술과 일본의 고급 문화를 경험한 그에게 해방 직후의 고국은 적응하기 힘든 혼란스런 세계였다. 좌와 우가 갈려 맞부딪치던 해방 공간. 남과 북은 각각 정부를 세웠고, 마침내 동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김종삼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폐허 위에서였다. 서울 명동에서 어울리던 문인과 예술가는 피란지 부산과 대구에서 다시 모였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김종삼은 개인적 비극과 마주친다. 절친했던 벗 전봉래(시인 전봉건의 형)가 1951년 2월, 피란지 수도 부산에서 자살한 것이다. 김종삼은 1953년 ≪신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피란지 대구에서였다.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기 시작한 시”였지만, 당시 문단에서는 그의 시를 불편해했다.
시인 김윤성이 그의 시를 ≪문예≫에 추천하기 위해 가져갔는데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지 못했다. ‘꽃과 이슬’을 쓰지 않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였다. 김종삼 시의 진가를 처음으로 높이 평가한 시인은 김춘수였다. 휴전 이후 서울에 정착한 그의 직업은 음악과 연관된 것이었다. 1955년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 음악 담당이란 직함을 얻은 김종삼은 1963년 동아방송(1980년 신군부에 의해 KBS 2 라디오로 통폐합됐다)에 입사해 1976년 정년 퇴임 때까지 근무한다. 1956년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지만 그는 성실한 생활인은 되지 못했다. 직장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생의 후반기에는 가정을 이끌지도 못했다.
정년 퇴임 이후 그의 삶은 불우했다. 가족의 부양은 물론 자신의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알코올 중독이었다. 1982년 세 번째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를 전후한 시들이 이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시 속의 죽음과 현실의 죽음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시인은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군부 독재가 신군부로 넘어가던 시대, 자본주의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던 고도성장 시대, 시인의 몸과 마음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매일같이 스스로 죽고 있”던 그는 마침내 1984년 8월 9일 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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