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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깊은 우물/ 강영은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깊은 우물/ 강영은

시낭송행복플러스 2020. 7. 22. 08:03

 

 

 

테린쿠유*는 입구가 좁고 낮은 문장, 무릎걸음으로 걸어야 읽을 수 있네 땅속으로 이어진 수천 개의 단락을 읽으려면 내 몸이 글자가 되어야 하네

 

돌로 통로를 막아버리면 단 한 명의 천사도 들어 올 수 없는 캄캄한 구절에 깜짝 놀란 나는 어두운 숲이 되기도 하네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어둠에 가로막힌 나는

돌벽이 파고 들어간 문장을 개미들의 교회, 개미들의 학교, 개미들의 공동 부엌, 개미들의 회의 장소, 개미들의 마구간과 포도주 제조 구역까지 있는 구문으로 오독하네

 

잘못 읽은 문장은 내게 지옥 같아서 이 지옥 속에서 어떻게 살까, 살 수 있을까, 더듬더듬 돌벽을 더듬는 생각이 깊이를 파네

내가 아는 건 보이지 않는 깊이에 우물이 있다는 거, 그 깊이를 지킨 자에게 천국이 임한다는 거, 그것이 내 믿음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지만

파문 듣는 귀가 내 마음 어딘가에 있는 것일까, 황량한 벌판으로 튀어나온 닭을 보네 닭 울음소리 끝에 끌려 나온 지하 우물을 보네

 

얼마나 많은 울음을 가두어놓아야 우물이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걷고 걸었던 문장 끝에 우물이 있었네 성문 밖에 나가 심히 운 베드로처럼 울음의 끝을 부인한 내 몸이 깊은 우물이었네

 

 

* 터키 데린쿠유에 있는 지하 8 층 규모의 지하도시

**단테의 神曲, 지옥 편에서 인용

 

 

계간 미네르바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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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 제주 서귀포 출생. 2000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풀등, 바다의 등』『마고의 항아리』『상냥한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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