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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그 따뜻한 혀(외 1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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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그 따뜻한 혀(외 1편)

시낭송행복플러스 2021. 12. 2. 09:33

저녁, 그 따뜻한 혀(외 1편)

 

전숙

 

 

 

폭풍우 지나간 폐허에 서서

누군가 말한다

생은 바람을 겪어내는 일이라고

 

저녁이 살금살금 기어오고 있다. 마중 나온 굴뚝 연기는 뒷짐 지고 서성이고 노을은 늘어지게 하품하는 하루를 핥는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일상이 굽은 허리를 펴는 언저리에 저녁의 혀가 태어난다.

 

저녁을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다

바람에 시달린 저녁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꽃 지는 목련나무는 모락모락 밥 냄새를 피우고

어느새 뭉클한 만복이 온몸에 퍼진다

 

저녁을 품기 위해 어둠은 넓어진다

어둠 침대에 하루치의 바람을 내려놓는 길고양이

 

관절 펴는 소리

낮아지는 숨소리

 

하루를 소화시키는 되새김질 소리

바람을 재우는 저녁의 소리는 혀처럼 부드럽다

하루를 쓸어주고 핥아준다

 

저녁의 형용사는 혀라고 달의 분화구에 새겨본다

달빛이 쑥 내민 혀로

폭풍에 휩쓸린 길고양이를 핥고 있다.

 

 

꿈을 팔아 욕심을 샀네

 

 

언제부터인가 꿈을 말하면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위로를 받네

나이를 먹는 것은

꿈을 팔아 욕심을 사는 것

눈물의 빛깔은 여전히 푸른데

꽃을 보고 심장이 뛰면

부정맥이 아닐까 걱정을 하네

쓸쓸한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무릎이 시큰한 달은

고갯마루에 걸려 숨을 헐떡이네

손을 내밀어도 아무도 다가오지 않을 때

꿈을 팔아 욕심을 샀네

등 떠밀려 꿈을 팔아먹은 욕심쟁이가 되었네

변명도 없이 속옷은 흘러내리고

잔주름 출렁이는 눈가에

주름주름 욕심만 떠돌아

꿈은 그렇게

좌판에 놓인 한물간 갈치처럼

썩어버린 내장을 소금 한 바가지에 감추고

본전도 안 되는 헐값에 팔려갔네.

 

 

⸺시집 『저녁, 그 따뜻한 혀』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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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숙 / 전남 장성 출생. 2007년 《시와 사람》으로 등단. 시집 『나이든 호미』 『눈물에게』 『아버지의 손』 『꽃잎의 흉터』 『저녁, 그 따뜻한 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