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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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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양파가 나를 훔쳐간다

시낭송행복플러스 2022. 7. 18. 19:27

양파가 나를 훔쳐간다

 

   김승희

 

 

 

양파가 나를 훔쳐간다

거울과 거울이 마주 보며 서로 훔쳐가듯

양파와 나, 마주 보며 서로 훔쳐간다

양파는 주인공이 없는 하나의 비애극

뼈도 없고 속도 없고 이빨도 없고

결사항전도 없이 폐허의 파편으로

눈동자에 매운 맛이 가득 고인다

 

바람이 부는가, 한 잎 한 잎 난해한 돌고 도는 운명

속없는 양파에 속절없는 나로다

양파가 나를 훔쳐간다

속잎 한 장씩을 떼어가다 보면

하얀 비애로 물들여진 폐허에 속없는 양파 속절없는 나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는 오라고

시인은 노래했는데

껍데기가 알맹이고 알맹이가 껍데기인 양파

속없는 한가운데 저 위험한 허공을 감춘 양파

 

옛날 어린 시절 만화책에서 본 것 같다

늘 붕대를 칭칭 온몸에 감고 다니는 남자

친절하고 따뜻하고 훌륭한 그 남자

붕대를 칭칭 온몸에 감고 있지만 음성이 멋진 남자

어느 날 여자는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기 위해 조심조심 붕대를 풀었다

칭칭 감긴 붕대를 다 풀었을 때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얼굴도 몸도 심장도 아무 것도 없었다

붕대가 그 사람이었다

 

양파는 끝없이 투명하고 투명하게 나를 훔쳐간다

양파가 나를 다 훔쳐가고 나면

얼굴 없는 양파가 얼굴 없는 나를 데리고

속없는 중심에 깃든 일그러진 여백에 도착한다

붕대 속에 아무 것도 없던 몸

주인공이 없는 비애극

속없이 속절없이 양파는 텅 빈 한가운데 저 위험한 허공을 가졌다

 

 

 

              —계간 《청색종이》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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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 1952년 光州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시집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냄비는 둥둥』 『희망이 외롭다』 『도미는 도마 위에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