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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초, 참 고단한 풀이름/박정남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고란초, 참 고단한 풀이름/박정남

시낭송행복플러스 2018. 4. 27. 20:23



고란초, 참 고단한 풀이름

 

  박정남




울기도 했는데

후회도 했는데

도망도 쳤는데

오줌도 쌌는데

 

적군에게 당하기보다는

우리 놀던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더 춤추며

우리끼리 술 마시며 놀다가

치마를 덮어쓰고 봄 꽃잎들 떨어지듯

가벼이, 우리 여럿이 서로 손 붙잡고

떨어져 내렸는데

 

그래서 낙화암이란 붉은 글씨는

만대에 빛나는 정절도 아니고

다만 다급한 선택이었는데

 

그 죽음들을 받아 빌고 있는

고란사가 백마강 부소산성 기슭에 앉아 있고

언제부터인가 그 낭떠러지 바위에

피어나기 시작한 고란초는

그 몇 안 되는 잎들과 뿌리조차 강바람에 다 내어놓고

반공중에 허허로이 헤매고 있는 울음

사무치고 또 사무치니

 

고란초

참 고단한 풀이름

여인들의 운명이라

 

시도 때도 없이 낙화암 고란사 쇠북 소리 운다

삼천궁녀 넋들의 겨우겨우 연명하는 목숨, 고란초가 흔드는

쇠북소리 길게 운다

 

     


                      —《시산맥》2018년 봄호



박정남 / 1951년 경북 구미 출생.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숯검정이 여자』『길은 붉고 따뜻하다』『이팝나무 길을 가다』『명자』『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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