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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스크랩] 김원각 편-석야 신웅순 본문
김원각 편
석야 신웅순
우람히 솟은 건축
층층히 불 밝혀들고
- 김원각의「목련」첫수 초장
1.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님의「목련」작품, 첫수 초장이다. 필자가 처음 접한 님의 작품이다. 목련을 하나의 우람한 건축에 비유했다. 놀랍다. 어떻게 언어로 그런 건축물을 세워놓았을까. 우람히 솟은 건축에 층층이 불을 밝혀든 수 많은 목련꽃들을 보라. 이보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또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님의 시조를 좋아한다. 우선 쉽게 읽혀져서 좋다. 읽어도 또 읽고 싶어서 좋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의미가 다가와서 좋다.
김원각의 시조는 매우 평범해서 쉽게 이해될 것 같지만 시를 음미하면 할수록 평범했 던 시구들은 돌연 생명력을 획득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그것은 마치 아무리 퍼내도 고갈되지 않고 늘 그만큼의 수량을 유지하는 작은 샘의 경이와도 흡사하다.
- 장영우의「텅 빈 마음에 집짓기」에서
님의 시조는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되어 있다. 산문을 읽는 것처럼 편지를 읽는 것처럼 쉽고 부드럽게 읽혀진다. 그러나 행간의 의미는 넓고 깊어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온다. 흔히 시인들은 의미를 낯설게 하기 위해 언어를 비틀어 놓지만 님은 비틀지 않고도 진리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만큼 언어를 넓고 깊게 사용한다.
첩첩 산 속 찾아갔더니
그 분은 부재중이다
한 동자가 그의 처소를
알려준대로 찾아갔더니
잠실의 우리집 아파트
아내와 마주첬다
- 김원각의 「부처」전문
첩첩 산 중 찾아갔더니 그 분은 부재 중이다. 지나가는 동자에게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알려준대로 찾아갔더니 간다는 게 겨우 우리집 아파트 앞이었다.
어디를 가든 남편은 아내의 손바닥 안에 있다. 아내는 남편의 동선을 손금보듯 보고 있고 깊숙히 숨겨둔 생각까지 꿰뚫어 보고 있다. 남편에게 말 한마디 던지지도 않는다. 두려운 존재 같기도 하고 편안한 종교 같기도 하다. 첩첩산중 찾아 나섰지만 부처는 결국 가까이에 있는 아내였다. 우리의 평범한 삶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은 아내가 곧 부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젊은 세대나 나이 든 세대에게 따뜻한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이다.
베란다 전체를 화초로 다 채우고
일 년 내 물 대주면 보살피느라 바쁜 아내
가꾸기 제일 힘든 나무가
남편이라며 웃는다
- 김원각의 「아내의 화원」
이 시조는 누구나다 ‘맞아, 맞아’하면서, 끄떡이며 공감할 것 같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 같기도 한, 흔한 말 같으면서도 흔하지 않는, 어긋난 것 같으면서도 어긋나지 않는 말이다. 사실 제일 가꾸기 힘든 나무가 남편일 것이다. 아내들은 흔한 말로 남편을 큰 아들 하나 더 키우고 있다고들 말한다. 사실이야 그렇겠냐만 남편이 아내 말을 잘 안 듣는다는 애정 표현을 그렇게 에둘러 말한 것이다.
장영우 교수는 그의 시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개인의 일상적 삶과 종교적 성찰이 겉도는 듯한 일부 선적 취향의 시와는 달리 그의 작품 세계는 일상과 종교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 장영우의「텅 빈 마음에 집짓기」에서
2.
나는 님을 시조로만 만났을 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님의 시조를 읽으면 님은 초연히 저만치 서 있는 것 같다. 명경지수, 순진무구의 마음씨 고운, 일절 때묻지 않은, 맑고 맑은 시인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도둑이 창에 걸린 달 그냥 두고 갔다며
료칸이 빈방에 앉아 바라보던 둥근 저 달
훔친들
둘 곳 있겠냐
그래서 그냥 갔나보다
- 김원각의 「달도둑」
료칸은 일본의 선승으로 하이쿠 작가이다. 초장에서 그의 시구 ‘盜人にとりのこされし窓の月, 도둑이 남겨 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를 인용했다.
료칸의 오두막은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도둑이 드는 일이 가끔 있었다. 어느날 도둑이 들어왔는데 아무 것도 가져갈 게 없었다. 료칸은 도둑에게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과 담뇨를 건네주었다. 도둑은 당황해서 어떨결에 받아쥐고 황급히 달아났다. 도둑이 사라져간 덧문으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료칸은 발가벗은 채 달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도둑이 달을 두고 갔구나. 그에게 저 달을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창에 걸린 달은 훔쳐갈 수 없다. 달을 줄 수 있다면 좋은데 그럴 수 없어서 대신 자신이 걸친 누더기 옷과 덮고 자는 담뇨를 도둑에게 주었다.
님은 료칸의 하이꾸를 인용해 자신의 화법대로 아주 평이하게 풀어냈다. 달을 따 간들 둘 데 없다니 종장에서 한 술 더 떴다. 휴머니티한 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생의 참맛과 참멋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잠시 손을 놓고 사색해 보고 싶은 시조이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3.
김원각은 1968년 『불교신문』신춘문예에 시 「정야」가, 1972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목련」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편역서 『이야기 대동야승』외를 펴냈으며 1993년 정운시조문학상, 1997년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다. 2016년에 졸했다.
멀리 보낸 그리움, 그대 맘에 닿지 못하고
그 언저리 맴돌다 와도 마냥 행복했는데
그리움
그도 늙었나
저만치 가다 돌아서네
- 김원각의 「첫사랑 그리움」
무엇이 부끄러워 그리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는가. 남들이 볼까봐 들켜서는 안되는 나만의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 그대 마음에 닿지 못하고 언저리만 맴돌다 왔다. 그만도 행복한데 늙었는가 저만치 가다가 돌아서고 마는 그리움이다. 늙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차마 다가갈 수 없었던 외경의 마음일 게다. 그리움에는 늘 안타까움만 있어 외려 그리움이 연인에게는 악연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루어지지 않아야 첫사랑이다. 그래서 그리운 것이다. 부처라도 좋다. 이도 인연이라면 인연이 아니겠는가.
꽃 피는 봄밤에도 낙엽 지는 가을에도
그대에게 보내는 사랑 시 한 편 못 썼네
내 사랑 상처가 많아서
생각 끝이 아파서
- 김원각의 「내 사랑은」전문
꽃 피는, 길고 긴 봄밤은 고독하다. 그래서 황진이도 ‘동짓날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이리 노래하지 않았는가.
낙엽 지는 가을도 봄밤 못지 않게 적막하다. 우수수 낙엽 지는 어느 가을날 진이가 그리워 서경덕은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에 어느 님 오랴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귄가 하노라.’ 이리 노래 부르지 않았는가.
꽃 피는 봄밤인데 낙엽 지는 가을인데 시인이 시를 짓지 못한다면 붓을 집어 던질 일이다. 공자는 기린을 보고 울었고 항우는 명마 추를 보고 울었다는데 그래도 진이와 화담은 시 한 수라도 서로의 가슴에 사랑한는 님을 얹어놓지 않았는가. 시인이 꽃과 낙엽의 계절에 사랑의 시 한 편 쓰지 못한대서야 무슨 시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랑의 상처가 너무 많고 생각의 끝이 너무 아팠는가 보다. 시 한 수 쓸 수 없는 이런 지경의 가슴 아픈 사랑도 있는가.
4.
님은 집에 관련된 시조들이 많다. 그가 짓는 집은 물론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공간이다. 집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이다. 이러한 현실적 공간을 시에다 은유나 상징 공간으로 옮겨놓았다. 님은 유토피아, 이상향인 평생 그런 집을 짓고 싶어 했다. 아니 신앙이다. 아마도 님에게는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였는지 모르겠다.
나도 허공 한쪽에 집 한 채 짓고 싶다
땅에서 괴로운 마음 저 높이만 올려놓아도
세상일 따라오다가 절반 이상 끊어질 것을
-김원각의 「까치집」전문
님은 저 높은 까치집에 괴로운 마음을 올려놓고 싶어 했다. 그러면 세상일 따라오다 절반 이상이나 끊어질 것이라고 노래했다. 물론 허공 속의 저 까치집은 속세, 현실 세계와는 단절된, 님이 그리워하는 공간이다. 마음에다 지으면 될 것을 왜 그런 허공 한쪽에 집을 짓고 싶다고 했을까. 그의 시조「일선사」가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북풍 한설 막으려면 땅 위에 집을 짓고
모든 번뇌 막으려면 마음에 집 세우는데
허공에 올려 놓은 집
땅도 마음도 끊어졌네
-김원각의 「일선사」 전문
북풍한설을 막으려면 땅 위에다, 모든 번뇌를 막으려면 마음에다, 땅도 마음도 끊으려면 허공에다 집을 지으라고 노래하고 있다. 님은 땅도 마음도 끊어지지 때문에 허공에다 집을 지으라고 스스로 화답하고 있다.
님의 집은 허공이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곧 현실이다. 살아가려면 육신을 쉬게 하는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님에게는 집이 세 채가 있다. 하나는 땅에 있고, 하나는 허공에 있고, 하나는 마음에 있다. 현실은 땅에, 꿈과 이상은 허공과 마음에 각각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신도시 일산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나 보다. 님은 비로소 세상의 주인이 된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었나 보다.
이제 못질할 자리 여기 찾아 왔습니다.
마음 똑바로 놓으려 여기 찾아 왔습니다.
비로소 이 세상 주인 그런 명함 들고서
밤 깊자 아이들은 별빛으로 떠서 놀고
아내 마음 그 곁에서 보름달로 비춰주고
하여간 행복이 있다면 그 복판에 앉았음이여
- 김원각의 「일산에서」1,3연
이 세상 주인으로 못질할 자리를 찾아왔고 마음 놓일 자리 찾아왔다. 밤이 깊자 아이들은 별빛으로 떠서 놀고 아내는 보름달로 비춰주고 나는 그 복판에 앉아있다. 이만한 행복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 족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것만은 아니다. 님의 집은 허공 말고 땅 위 말고 마음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짓고 있다.
마음 맑게 고이는 곳에 빈터 하나 열린다
높은 산 둘러 앉히면 만사가 쉬게 된다
극명한 이치 하나로 내 속에 세워진 절
- 김원각의 「백담사」전문
만사가 쉬게 되는 산으로 둘러싸인 내 속에 세워진 극명한 이치 하나가 있다. 그것이 마음 속에 있는 절이다. 한 채는 현실적인 집이요 두 채는 이상적인 집이다. 현실적인 집이라해도 저리 욕심 없이 살며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님에게는 이상적인 집이나 다름이 없다. 사실 이러한 집들이 다 세속적인 탐욕을 벗어난 님이 바라는 신앙 같은 유토피아가 아니고 무엇이랴.
님에게 집은 무엇일까. 바로 부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님에 대해 잘은 모르나 평생을 절 근처를 살아온, 삶 자체가 그런 분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님은 그 언저리를 맴돌아와도 마냥 행복하다하지 않았는가.
5.
길을 잃지 않으려면 깊이 들어가지 말고 기이한 경치를 보려거든 깊이 들어가라고 한다. 님의 작품에 깊이 들어가면 길을 잃을 것 같다. 물소리만, 새소리만 듣고 와야될 것 같다. 깊은 산 중에서 헤멜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음을 텅 비워야 이런 시가 태어나는 것인가. 넓고 깊은 시를 쓰려면 시 쓰는 일 보다 마음의 수양이 먼저라는 평범한 생각을 해본다. 그 화두를 평생 실천하신 님처럼 말이다.
미련이 남아 한 수 더 소개한다.
달빛 아래 모여 앉은 서울서 온 친구들
몇 순배 술이 돌고 잡담으로 떠들썩한데
앞산에 소쩍새 울자
자리가 순간 고요해졌네
- 김원각의 「소쩍새」전문
-서예문인화, 2018,7, 120-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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