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림체/ 유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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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 내리면

깜박 저녁이 밤으로 머릴 디밀 것 같은 때

아까워라

도로 아까워서 저녁 하늘을 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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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눈썹이 짙어진 하늘 가에

기러기 떼인가 청둥오리 떼인가

멀고 어둑해서 어느 것이어도 틀리지 않는 새 떼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채찍처럼

제 무리를 휘갈겨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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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한 번 내 허리에 아주 헐렁하게 감아 보고도 싶은

흘림체의 허리띠가

조였다 풀었다

내둘렀다 감았다

으늑한 운필(運筆)이 낙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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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반가운 울음이 섞인

흘림체가 번지듯 내려앉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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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들판이나 샛강 가에 가며는

등 따신 햇빛을 쬐며 부리로 땅에 점자(點字)할 새 떼들,

그 흘림체가 모이 쪼는 곁에

나는 바람의 먹〔墨〕을 가는 나무로나 서 있을까

무엇을 쓰든 사랑의

허기를 면하는 길로

발길이 번지는 흘림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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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인수첩》 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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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 시 등단.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 『아껴 먹는 슬픔』 『수수밭 전별기』 『숲시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