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눈물이 온다(외 2편)/ 이병률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눈물이 온다(외 2편)/ 이병률

시낭송행복플러스 2020. 9. 9. 12:33

 

 

왜 눈이 온다, 라고 하는가

비가 온다, 라고 하는가

 

추운 날

전철에 올라탄 할아버지 품에는 작은 고양이가 안겨 있다

 

고양이는 이때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할아버지 어깨 위로 올라타고

사람들 구경한다

 

고양이는 배가 고픈지 울기 시작했는데

울음소리가 컸다

할아버지는 창피한 것 같았다

 

그때 한 낯선 청년이 주머니에서 부스럭대며 뭔가를 꺼내

작은 고양이에게 먹였다

 

사람들 모두는 오독오독 뭔가를 잘 먹는 고양이에게

눈길을 가져갔지만 나는 보았다

 

그 해쓱한 소년이 조용히 사무치다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안으로 녹이는 것을

 

어느 민족은 가족을 애도중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외출할 때 옷깃을 찢어 표시하고

 

어느 부족은 성인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성기의 끄트머리를 잘라내면서 지구의 맨살을 움켜쥔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심장에 쌓인 눈을 녹이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에 등불을 켠다

 

 

슬픔이라는 구석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 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하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람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

 

몇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마스크를 태우면서 혀를 씻었다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머리에 파고들어 온 이 무언가를 잘 기억하자고

창궐하는 생각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20209)

-----------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한국일보신춘문예로 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