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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거대한 밭 (외 2편)/손음 본문
거대한 밭 (외 2편)
손 음
깡마른 손 하나가
채소밭 하나를 밀고 간다
불구덩이 땡볕을 이고
오직 밭고랑을 밀고 간다
내리 딸자식만 일곱을 둔
거북 등짝 같은 할머니가
한여름 찢어대는 매미 소리를 이고
시퍼렇게 돋아나는 잡초를 밀고 간다
잡초들은 믿기지 않는 광기를 뿜어내며
할머니를 에워싼다
할머니는 호미 한 자루로 밭을 지키려 한다
상추와 호박과 고구마 속에서
열무와 고추와 가지 속에서
할머니는 진저리를 치며 호미질을 한다
진저리치는 만큼 잡초들은 자란다 전속력으로 자란다
상추와 호박과 고구마와 잡초와
열무와 고추와 잡초와 할머니가
서로가 서로를 저항하면서 자란다
이런 오살할!
욕이란 욕 다 얻어먹어 가며
비로소 여름은 완성되고 있다
고백
비가 내리고 수제비 뽀얀 국물이 빗소리로 들끓는다 선반에는 먼 나라의 접시와 촛대가 있고 비는 중얼중얼 흘러내린다 수제비를 먹다가 창밖을 보다가 시무룩한 평화가 찾아든다
쏟아진 김칫물이 식탁의 가장자리에서 그대로 멈춘다 붉은 줄의 난간에 서서 우리는 표지판 하나씩 들고 서로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다 비가 내리고 오로지 그는 창밖에 서 있고 나는 너무 식탁에 오래 앉아 있다
먹다 만 수제비가 있고 깍두기가 있고 목이 긴 꽃병의 절벽 속으로 빗소리가 걸어 들어간다 빗방울이 허공을 바늘 찢는다 우리는 어쩌다 빗방울 속에다 집을 지었나
누가 밤의 긴 머릿결을 저리 오래 빗질하고 있나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식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다 그는 늘 창가의 사람, 그가 다시 문을 두드린다 빗방울을 두드린다 밤새도록
똑똑, 저 비의 말을, 나는, 어찌할,
바닷가 마지막 집
햇살이 꼬들하다
무거운 고요가 더러운 개 한 마리를 끌고 다니는 정오
빨간 다라이에 핀 접시꽃이나 본다
채반에 널린 납세미나 본다
상자같이 허술한 집에 건들건들 한 채의 배를 타고 앉은 듯
달포째 저렇게 잠겨있는 사내,
이런 개…
설핏한 나이에 죄다 욕으로 마시는 소주를 뭐라 말할까
모든 걸 다 떨어먹고 여기까지 와서
생이 이렇게 요약될 줄 몰랐다
그래 어쩔래, 나 이제 고집 센 쉰이다
창문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
사내를 닮은 집도 말이 없다
그 둘이 서로를 껴안고 있는 동안
사내는 선창가나 한 바퀴 돌까 말까
천막 횟집에 상추쌈을 싸주느라 난리도 아닌 커플이
입이 찢어져라 좋아 죽는다
확, 불이라도 싸지르고 싶은 저녁이라면 어쩔 것이냐고,
파도 소리 귀에 고이도록 쉰을 넘긴
한 척의 사내 기우뚱, 서럽다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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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음 / 본명 손순미.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199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칸나의 저녁』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연구서 『전봉건 시의 미의식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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