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나무를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외 4편)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나무를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외 4편)

시낭송행복플러스 2021. 10. 20. 07:04

나무를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외 4편)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나무 잎을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로 먹기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잡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 같아서 뼈째 씹어야 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 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 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_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성난 여자



시장 다녀오는 길에 골목 끝에서부터
몰아치는 악다구니 여자 목소리
하늘 높이 치솟아 욕을 해대는데
여자를 찾을 수 없다 모자가 벗겨지듯 지붕이 날아가고
간판이 데굴데굴 굴러 전봇대를 들이받는다
양은 대야가 챙챙 울부짖다가
훌쩍 허공으로 날아갔다
비눗물이 뿌려져 비눗방울들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질끈 감는데
저 복장 터지는 목소리의
첩첩 광활은 어디 있나
까마득히 먼 북쪽 우랄알타이산맥을 넘어
출렁이는 젖을 물린 채 사납게 먹이를 낚아채 깔깔거리며
지평선을 달리던 초원의 여자는,
고려청자도 이조백자도 들까부수는
저 암팡진 본데없는 여자는 어디 있는가 사내들 두리번거리고
온 천지를 치대는 저 성난 여자
한 번도 문 밖으로 떠나보지 못했던 것들만
골목을 꺼들어 떠내려가는데,
얼굴 없는 낯을 붉히는 저 여자
성난 소리만 잔뜩 쏟아놓고 어디에 꽃같이 숨었나
울끈불끈 불을 뿜는 붉게 물든 목소리의 골목을 보여다오
장쾌도 우렁찬 그 목소리의 고향을 보여다오
구경꾼들 성나기 전에
힘껏 걷어차 성나듯 나와봐라

 

 

 

예약된 마지막 환자


나의 병은 주치의의 주특기, 삼십 년째 이 원인 모를 난치병을
연구했고 당연히 국내 유일한 권위자로 성장했다
그에게 나는 오늘 혼이 났다
먹어서는 안 될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남몰래 복용했기에
그의 예단대로 통증은 격심했고
불면은 깨진 유리처럼 저항력을 손상시켰다
두 손을 모아쥐고 머리를 조아리며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는 극단의 처방을
거두시기를 앙망하느라
내 눈자위가 떨잠처럼 으달달 떨렸다

차트를 갈겨쓰는
창백한 흰 가운의 그는
환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법이 없다
나는 소독된 햇빛이 비치는 책상 위
모형 범선을 보고 있었다
펜을 멈추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제 의료 인생은 선원들과 함께한
험난한 항해와도 같았죠 닻을 내리기 전까지
무엇보다 선원들과 싸워야 합니다

휘날리는 필기가 끝나고 마침내 새 처방이 나왔다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합니다

그건 좀 어려워요 직업이나 식사 무엇 하나
규칙이긴 힘든데다 고독한 처지예요
더구나 시는 읽을 줄 몰라요

건강을 돌보라는
간단한 충고조차 들으려 하지 않는군
그는 깨진 유리처럼 인상을 쓰고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간호사기 황급히 물잔과 알약을 대령하자
약을 털어 삼키는 동안
시꺼멓게 반달진 그의 눈 밑이 엿보였다

자가면역질환은 우리 몸이 자신의 세포를 적으로
오인하고 스스로를 공격하여 생기는 통증이지요
나는 환자들을 내 몸처럼 여겨요 그런데 왜!
처음으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으달달 떨며
폭죽처럼 실핏줄이 터졌다

선생님, 통증이 심하신가요?
그는 두 손을 모아쥐고 간절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슴뿔 고아 짠 용을 복용하셨나요?
그는 그건 이미 십 년 전 일이라고 못박았다
나는, 여명시에 깨어나 땀에 흠뻑 젖도록 일하고
일몰시에는 가족과 함께 영양이 풍부한 저녁식사를 한 뒤
시를 읽다가 잠들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그는 직업상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나는 내 말을 믿지 않는 환자는 진찰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고
나는 간호사에게 외쳤다
다음 환자!
그는 흰 가운에 청진기를 건 채 훌쩍이며 문을 열고 나갔다
간호사는 그가 예약된 마지막 환자였다고 말했다




불가리아 여인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
불가리아 여인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 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_200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우리는 죽어요 곧



불면이 새하얗다는 거, 당신들이 더 잘 아는 거짓말
나날이 갚아야할 빚처럼 주렁주렁
밤은 빨갛고 잠은 못을 물고 망치를 든 채
어디야 어디에 박아줄까
대가리만 치면 돼, 못이 파고든 자리만큼 별이 튕겨나오는 벽도
하나의 은하계 지금 보는 별은 이미 사라진 벽의 입자
눈높이가 좋겠어요 고개가 아프면 안 될 만큼
시선을 벗어둘 만큼
쓸모 있는 높이, 나를 걸고 싶어지는 높이, 걸면 당신들의 혀가 빼물리는
높이, 누군가 발견하기를 원하여
하필 집의 벽, 의자를 놓고 뚱땅땅땅 별 튀기는 자리를 쳐다보지
오늘만 살도록 하자 오늘만
잠들지 않으니 매일 똑같이 오늘
그럼 이런 주문은 어때, 술 취해 터진 보도블록을
오버로크로 박아 걷는 아저씨, 우리는 죽어요 곧.
나는 아물린 보도블록을 찢어 벌려, 나도 죽고요 곧, 아저씨도 죽고요 곧
그런데도 우리는 왜 취해서 걷는 거죠, 그새를 못 참아
죽음에 가까워져 보는
목을 동여맨 번지점프의 스릴
눈을 조금만 더 들어올리면 어떻게 될까요
다 죽어요 아프지 않고도 죽어요 그새를 못 참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당신들의 멱살을 진자처럼 흔들고 싶은 밤은
질질질 브레이크를 밟아도 얼마쯤은 끌려가는 밤은
새하얗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가 피날 때
웃고 있는 당신들 생각하면
그새를 못 참게
한결 가까워진 못
모가지를 양복 윗도리처럼 걸고
난 스스스 뱀으로 빠져나오는 거예요
갈라진 혀도 날름날름
데굴데굴 새빨간
밤은 달아나고 독도 없이 뱀 주제에 나는 쫓아가고
잠은 못을 입에 물고 나는 망치를 들고
우리는 죽어요 곧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2021년 10월

 

 

 

이윤설 / 1969년 경기도 이천 출생. 명지대 철학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6년 조선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희곡집 『불가사의 숲』.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2020년 10월 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