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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한양도성 순성길 인왕산 구간 본문

길따라 시따라, 시가 있는 여행

한양도성 순성길 인왕산 구간

시낭송행복플러스 2021. 11. 24. 08:49

인왕산구간

일시:  2021년 11월 24일  10시 (서대문역 4번 출구)

구간 : 돈의문 터 ~ 창의문

거리 : 4.0km

소요시간 : 2시간 30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해발 339m인 인왕산은 풍수상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거대한 바위들이 노출되어 있는 바위산으로 치마바위, 선바위, 기차바위 등 기암괴석이 많다. 인왕(仁王)은 불교식 명칭으로, 무학대사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681·21 사태 이후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다가 1993년 개방되었다.

 

24시간 개방

 

인왕산은 바위 구간이 많아서 겨울철 등산 시에 주의해야 한다. (인왕산으로 진입하면 화장실이 없으므로 출발 전 미리 다녀오는 것이 좋다.)

 

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경교장-월암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인왕산 순성 안내쉼터-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도보 5돈의문터(강북삼성병원)

시청역(1,2호선) 2번 출구 도보 12돈의문터(강북삼성병원)

간선 101, 710, 470, 471, 704, 720, 601, N37(서대문역사거리)

종로05(강북삼성병원)

 

 

돈의문 터에서 출발하려면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에서 도보 15,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도보 5분이 소요된다. 돈의문 터~월암공원~사직근린공원으로 한양도성 안내표지판을 따라 인왕산으로 진입한다.

하산하는 길에 창의문 밖 부암동을 들러보거나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을 들러보는 것도 좋다.

 

 

 

구간주요지점

 

돈의문 터 (敦義門)

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이 있던 자리이다.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세종 4(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이다. 이후 돈의문은 새문 또는 신문(新門)으로도 불렸으며, 현재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이에서 유래한다. 1915년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다.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경교장(京橋莊)

<사적 제465>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1946년까지 사실상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된 곳으로, 국무위원회 개최 및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또한 주석 김구가 약 4년간(1945~1949) 거주하다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서거 이후 60년간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병원시설 등으로 사용되다가 20133월 김구 거주 당시의 임시정부 활동공간으로 복원하여 시민에게 개방하였다.

 

 

서울 한양도성의 흔적들(월암공원 일대)

월암공원을 따라 최근에 성벽을 새로 쌓았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서울시 복지재단(구 기상청 건물)의 담장 축대 아래 묻혀있던 성벽의 일부가 드러났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부근 연립주택 건물 주차장 뒤편에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문화재 제90> ‘봉선화’, ‘고향의 봄등으로 유명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1898~1941)가 살던 집. 그의 대표곡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작곡되었다. 1930년대 서양식 주택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딜쿠샤(테일러 가옥)

딜쿠샤는 미국인 금광 기술자로 UPI 서울특파원을 겸하면서 3·1 운동을 세계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거주(1923~1942)했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이 건물의 내력은 2006년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방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딜쿠샤 바로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집에 있던 나무로 전해지며, 행촌동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유래한다.

 

 

 

사직근린공원 부근 성곽

한양도성 전 구간 중 성 안과 성 밖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성벽 안쪽의 넓은 길에서는 도심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편히 걸을 수 있고, 바깥쪽 오솔길에서는 담쟁이넝쿨과 고풍스러운 성벽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조경 및 조명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밤에 보는 성벽의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중요민속문화재 28> 조선 태조 때 남산에 세운 국가 신당이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헐자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던 무속인들이 인왕산 서쪽 자락으로 옮기고 사설 무속 신당으로 바꾸었다. 국사당 위쪽에 있는 선바위는 고깔 쓰고 장삼 입은 승려가 참선하는 형상의 바위이다. 불교를 배척했던 정도전이 한양도성의 경계를 정하면서 일부러 선바위 있는 곳을 제외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상촌 上村, 우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도시형 한옥이 다수 남아 있는 마을이다. 조선 후기에는 상촌(上村), 우대 등으로 불렸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왕족, 고관대작의 집과 별장도 도처에 있었지만, 주로 말단관리인 경아전(京衙前)들이 많이 살았다. 상촌인이라는 말은 경아전(京衙前)과 동의어였다. 조선 말기에는 중인 지식인들의 시회(詩會) 장소로 자주 이용되어 여항(閭巷) 문학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근대 이후에는 시인 이상과 윤동주 · 화가 노천명 · 이중섭 · 천경자 · 이상범 등이 이 일대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인왕산 순성길

해발 338m인 인왕산은 큰 화강암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바위산으로 정상에 가까울수록 험준하다. 이런 지형적 특성 때문에 경사가 급한 곳에서는 자연 암반이 성벽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큰 바위들과 어우러져 끊어질 듯 이어진 성벽은 한양도성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인왕산 정상 가까운 곳에는 무악재와 안산(무악) 방향으로 길게 돌출된 곳이 있는데 이런 지형을 활용하여 곡성(曲城)을 쌓았다. 곡성이란 주변을 관찰하기 좋은 전략적 요충지에 성벽을 지형에 따라 길고 두글게 내밀어 쌓은 성을 말한다. 인왕산 곡성은 현재에도 군사시설로 이용되고 있어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축성 시기별 축성 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인왕산 구간에서도 시기별 축성 방법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정상에서 치마바위를 지나면 탕춘대성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부터는 성 안팎으로 길이 나 있다. 성 바깥 길을 걸으며 성돌의 모습을 눈여겨보자. 태조 · 세종 · 숙종 · 순조, 그리고 그 이후에 쌓은 성돌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 인왕산 자락 서쪽 끝, 창의문 부근에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했는데, 그가 이 일대를 거닐며 시상(詩想)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 언덕 위에 그의 대표작 서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가 있으며, 가까이에 윤동주문학관도 있다.

* 윤동주 문학관 관람 시간 : 10:00~18:00 매주 월요일, 명절연휴(시정, 구정, 추석) 휴무

 

 

최규식 동상/청계천 발원지

창의문 앞 길가에 1·21 사태로 순직한 최규식 동상이 있다. 19681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였다.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북한군과 교전 중 창의문에서 순직하였다. 이 사건 이후 백악과 인왕산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1994년에는 인왕산이, 2007년에는 백악이 각각 다시 개방되었다.

*청계천 발원지 표석 :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에서 약 150미터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고 적혀있다.

 

 

창의문(彰義門)

<보물 제1881>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윤동주 (尹東柱, 19171230~ 1945216)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 독립운동가, 시인이자 작가이다. 191712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번지이다. 명동촌은 북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북간도로 집단 이주한 후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등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북간도 최대의 한인촌을 형성했다.

 

명동학교 에서 수학하였고, 평양 숭실중학교 와 서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소년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 에 입학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고종사촌형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본명 외에 동주와 윤주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

윤동주 시모음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 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 ,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 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자화상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에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었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몰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