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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도심속 문학기행 2회차 본문

길따라 시따라, 시가 있는 여행

도심속 문학기행 2회차

시낭송행복플러스 2022. 4. 12. 16:56

이서윤과 함께 하는 시낭송행복플러스

시와 해설이 있는 도심속 문학기행

2회차 서촌(10:00-12:00) 세종마을


∙일시: 2022 04 13 (수) 10시 경복궁역 4번 출구

∙코스: 보안여관 시인부락 창간터 →세종대왕 태실 표지석→이상시인 집터, 노천명집터→근대 6대 화가 이상범 가옥,

천경자화가 집터 →박노수 화가 미술관→윤동주 하숙집터, 이중섭화가 집터→수성동계곡(겸제정선의 옥류동천) 

 

∙보안여관→세종대왕 태실 기념비(예상시간 10:20-10:40)
-이동시간 5분 250m(10:20-10:25)
-관람시간 5분(10:25-10:30)

∙세종대왕 태실 기념비→이상집터(10:30-11:30)
-이동시간 34분 250m(10:30-10:35)
-관람시간 10분(10:35-10:45)


∙.이상시인 집터→이상범 가옥(10:40-10:50)
-이동시간 5분 310m(10:40-10:45)
-관람시간 5분(10:45-10:50)

∙.이상범 화가 가옥→박노수미술관(10:50-11:00)
-이동시간 6분 430m(10:50-10:56)
-관람시간 14분(10:56-11:10)


∙.박노수 화가 미술관→윤동주하숙집터(11:10-11:00)
-이동시간 3분 100m(11:10-11:13)
-관람시간 7분(11:13-11:20)

∙.윤동주 시인 하숙집터→수성동계곡(11:20-11:40)
-이동시간 7분 300m(11:20-11:27)
-관람시간 13분(11:27-11:40)


∙그 밖의 이야기
-송강정철 문학시비
-노천명시인 집터, 천경자화가 집터, 이중섭화가 집터
-상춘재, 윤동주문학관
-겸제 정선의 옥류동천, 인왕제색도 등

 

∙시인부락
《시인부락》은 1936년 11월 14일 창간 제1집을 낸 시 전문지인데, 그 해 12월에 제2집을 내고 종간되었다. 당시 혜화전문학교 학생이던 서정주가 주재했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서정주(서울·통의동 3), 인쇄인 조수성, 인쇄소 중앙인쇄소, 발행소 시인부락사(서울·관훈동 27-3), A5판 32면, 정가 20전이다.


제1집 첫면에는 동인들의 이름이 발표되었다. 김달진 김동리 김상원 김진세 여상현 이성범 임대섭 박종식 서정주 오장환 정복규 함형수 등 12명, 그리고 제2집에서는 오화룡 이시복 이용희 이해관 4명이 더 가입했다.
제1집은 200부를 발행했는데, 그 비용은 동인 각자가 10원씩을 내었다고 하니 그 형편이 짐작된다. 판권장에 나온 서정주의 주소 ‘통의동 3번지’는 그가 묵고 있던 보안(保安)여관의 소재지이고 보면, 그는 이 여관에서 잡지를 기획하고 편집했던 것이다. 그때 한방에서 기거했던 함형수와 함께 한 일이었다.
그 첫머리를 장식한 함형수(1914~1942)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은 발표되자 호평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그의 수작으로 꼽힌다. 그 전문을 감상해 보자.

 

해바라기의 비명/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새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또 서정주의 〈문둥이〉는 어떤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시절 천형(天刑)의 불치병으로 알려졌던 나(癩)환자의 처참한 모습을 단 5행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국화 옆에서/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촌과 세종마을
서촌(西村)은 종로구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지역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흔히 장의동(藏義洞, 壯義洞)이나 장동(壯洞), 우대[上垈]로 불렸으며, 2010년대 들어서는 세종마을로도 불리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의 거주지로 유명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문인과 예술인이 많이 자리잡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경호와 경비 목적으로 여러 규제를 받아 쇠퇴하였으나,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상(1910-1937)
서울 태생. 서울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동광학교(중학과정)에 입학했으나 1922년 동광학교가 해체되면서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고유섭‧유진산‧이헌구‧임화 등과 동기였으며, 김기림‧김환태 등은 1년 후배였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 졸업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다. 1929년 12월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다.


1934년 김기림‧이태준‧정지용 등이 중심이었던 ‘구인회’에 입회하고, 『조선중앙일보』에 7월부터 8월까지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하다가 독자들의 비난으로 중단했다. 1937년 일경에 의해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검거되어 2월 12일부터 3월 16일까지 구금되었다가 건강 악화로 풀려나와 도쿄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으나 4월 17일 사망했다.
그는 시, 소설, 수필에 걸쳐 두루 작품 활동을 한 일제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특히 그의 시와 소설은 1930년대 모더니즘의 특성을 첨예하게 드러내준다. 또한 그의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 양식의 해체를 통해 현대인의 삶의 조건을 보여주는데, 「날개」의 경우 그것은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어떤 일상적 현실과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파편화되고 물화된 현대인의 소외로 나타나고 있다.

 

거울/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려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괘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근대 6대 화가 이상범
청전 이상범 1897~1972 (충남 공주)
이당 김은호 1892~1978 (경기 부천)
의제 허백련 1891~1977 (전남 진도)
소정 변관식 1899~1976 (황해 옹진)
심향 박승무 1893~1980 (서울 효자)
심산 노수현 1899~1978 (황해 곡산)


청전 이상범 1897~1972 (충남 공주)
이상범이 태어난 지 6개월만에 부친이 50세로 타계하자 10살 되던 무렵에 모친과 함께 공주에서 서울 돈화문 부근으로 이주했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우승하는 장면의 사진을 신문에 게재할 때 당시 『동아일보』에 사진부 기자로 근무하였던 이상범은 체육부 기자의 요청으로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게재하여 구속 취조를 받고, 동아일보사를 퇴직하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노수현 · 이종우(李鍾禹)와 친밀하게 교유하였고, 이광수 · 이은상 등 문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1936년에는 마지막이 된 제15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하였으며 작품에 전념하였다.


∙박노수(1927-2013)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금사리
호는 남정. 청전 이상범(李象範)을 사사하고 195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한국화 전공)를 졸업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으로 약칭)에서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청아하고 선적(禪的)인 경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화경을 개척했다.

 

∙윤동주(1917.12.30 ~ 1945.2.16.)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쉽게 쓰여진 시/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겸재 정선
겸재 정선(1676 ~ 1759)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로서 진경산수화가 대대적으로 유행하는 계기를 만든 선구적인 인물이다. 사인 관료 출신의 문인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화원화가를 능가했을 정도로 그림을 많이 그리고 잘 그렸다. 또한 조선후기의 진경풍속을 조선적인 화풍으로 정립하고 대성(大成)한 창조적인 업적을 남김으로써 '화성(畵聖)'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화가이다.
80세에 노인직으로 첨지동추부사의 당상에 오르고, 81세에 다시 노인직으로 동지중추부사의 아경(亞卿)을 제수받아 재상의 반열에 오른 뒤, 1759년 3월 24일 84세에 사망하고,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에 안장되었다. 사후 13년이 지난 1772년에는 지극한 효성이 알려져 한성판윤의 정경에 추증되는 영예까지 누렸다.

 

정선, 필운상화, 18세기, 견본담채, 18.5×27.5cm, 개인 소장.
지금의 필운동의 배화여고 뒤편에 있는 필운대 언덕을 그린 그림이다. 언제나 화사한 봄기운을 전해주는 경쾌한 그림으로 가까이는 서촌의 복사꽃과 중경에 남산과 멀리 관악산을 표현한 듯하다.
정선 장동팔경첩<옥류동천> 29.3×33.5 간송미술관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여름철에 모여 휴양을 즐기던 계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장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과 청운동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과거에 인왕산의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과 옥류동으로 나뉘어 흘렀는데, 이 물줄기들이 기린교(麒麟橋)에서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유입하였다. 세월이 흘러 옥류동 계곡은 콘크리트로 덮이고 주택가로 변하였지만, 수성동 계곡은 아파트 철거 후 옛 모습을 되찾아 맑고 아름다운 물소리를 내며 흐른다. 안평대군이 살았던 비해당과 근교의 기린교가 있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수묵, 79.3×138.2㎝, 삼성미술관 리움.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모습을 지금의 효자동 방면에서 보고 그린 것으로 정선이 76세에 그린 만년의 걸작이다. 화면 위를 가득 채운 바위의 대담한 구도와 먹색의 강렬한 흑백대비를 통해 마치 바로 앞에서 바라본 듯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지금의 정독독서실 부근 언덕에서 그렸다고 한다.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종이에 수묵담채, 30.7×94.1㎝, 국보 제217호, 삼성미술관 리움. 이 그림은 정선이 완숙기에 접어든 59세에 그린 것으로 그의 금강산도 가운데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는다. 내금강의 전경을 부감하여 원형의 구도로 압축하여 나타내고, 굳센 수직준으로 그린 바위산과 부드러운 미점의 토산의 대비를 강조하여 금강산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정선은 이 그림 위에 “발로 밟아서 두루두루 다녀 본다 하더라도 어찌 베갯머리에서 이 그림을 마음껏 보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썼다.

 

겸재 정선 퇴우이선생진적첩<계상정거도> 1746년 지본수묵 40.1×25.4 보물585호 리움미술관
조선 중기 유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이 고민 끝에 세상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 곳으로 선택한 곳이 지금의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이며, 직접 건축에 참여한 건물이 도산서당이다. 현재 1000원 화폐에 쓰인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