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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여우와 함께 산책을/안도현 본문
여우와 함께 산책을
안도현 눈 내리는 산길을 혼자 걷다가 여우를 한 마리 만나면 나는 쇄골이 하얘질 것이다 여우한테 넘어가서 여우를 따라서 눈이 더 세차게 몰아치는 골짜기로 들어가서 나는 여우굴에 들어가서 백년 동안 신세를 지고 살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여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고심 끝에 나는 여우가 찍어 놓고 간 발자국을 먼저 찾아보기로 하였다 여우는 제가 지나간 흔적을 꼬리로 지우고 자신의 경력을 길게 기술하지 않는다 하였다 솔직히 남조선은 지루하다는 것 있는 게 너무 많고 있어도 갖고 싶은 게 많다는 것 없으면 모두들 갖고 싶어 죽도록 출근한다는 것 여우를 만나면 나는 이렇게 말할 작정이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함흥을 갔다가 오자 여기는 국경이 없어 슬프지 국경이 없어서 월경이 없잖아 월경이 없어서 넘어가는 일이 없잖아 넘지 못해서 일탈이 없잖아 헛된 것을 한 번도 쫓아가 보지 못하고 의미 없는 것을 평생 물어보지 못하고 여우는 제 발자국을 다 지우지 못하고 총총 사라진 게 틀림없었다 그 골짜기, 눈 퍼붓는 응달에 산수국 마른 가지 끝에 여우가 발자국을 얹어 놓은 것을 발견하고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여우는 신접살림을 차리러 떠났다는 말인가 모쪼록 여우와 함께 산책을 하고 싶다면 그 산수국 헛꽃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찾아볼 일이다 ⸺계간 《시산맥》 2022년 봄호 ------------------- 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간절하게 참 철없이』『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백석 평전』외.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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