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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 문정희

시낭송행복플러스 2016. 4. 26. 09:07



거위

 

  문정희

 

   

나는 더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인 것 같다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오늘 텔레비전에 나온 나를 보고

왝 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

 

내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떠밀리고 있었다

 

구멍 난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차갑고 더러운 물을 숨기며

시멘트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빈틈과 굴절 사이

순간순간 태어나는 고요하고 돌연한 보석은

사라진 지 오래

기교만 무성한 깃털로

상처만 과장하고 있었다

 

오직 황금알을 낳기 위해

녹슨 철사처럼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는

나는 과식한 거위였다

 

 

 

              ㅡ《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문정희 시인/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문단과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아 온 문정희 시인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첫 시집 『꽃숨』을 발간했다.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문학 포럼에서 작품 「분수」로 〈올해의 시인상〉(2004), 2008년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문학 부문 등을 수상했다.1996년 미국 Iowa대학(IWP)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영어 번역시집 『Windflower』, 『Woman on the Terrace』, 독어 번역시집 『Die Mohnblume im Haar』, 스페인어 번역시집 『Yo soy Moon』, 알바니아어 번역시집 『kenga e shigjetave』, 『Mln ditet e naimit』외 다수의 시가 프랑스어, 히부르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저서로 『문정희시집』, 『새떼』,『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찔레』, 『하늘보다 먼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지금 장미를 따라』『사랑의 기쁨』 외에 장시 「아우내의 새」등의 시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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