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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하늘은 공평하게/ 김승희

시낭송행복플러스 2016. 4. 26. 09:07



하늘은 공평하게


  김승희


 


하늘은 공평하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노인에게도

아장아장 걷다가 모래밭에 엎어지는 아가에게도

정장 양복을 차려입고 생명보험을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에게도

아기를 잃어버리고

젖몸살이 난 퉁퉁 불은 젖을 짜고 있는

탐스러운 젊은 엄마의 곡선의 유방 위에도

박사과정 학생의 무거운 가방 속으로도

노점상 아주머니의 산처럼 쌓인 과일 위에도

정신이 혼미한 할머니의 혈관 주사액 주머니 속으로도

하늘은 공평하게 하늘을 골고루 나누어주신다

 

누구의 하늘인가?

누구의 파란 하늘인가?

난 하늘이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자기자신을 나누어주시는 것이 좋다

하늘은 누구의 것이 아니어서 더 좋다

내 것이 될 수 없어서 더더욱 좋다

 

시간은 떨어지는 칼과 같아서

나 하늘나라 갈 때도

저 산 위에 꼭 저대로 저 하늘 걸어놓고

하얀 신경의 흉터 하나도 남기지 않고, 걷어가리,

두고 가리,

놓고 가리, 저 파란 하늘 그대로


  

              ㅡ《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김승희 시인/ 1952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된 후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되어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을 출간하기도 했다. 산문집으로 『33세의 팡세』, 『사랑이라는 이름의 수선공』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캣츠』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강의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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