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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바람 불어 너도나도바람꽃/이원규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바람 불어 너도나도바람꽃/이원규

시낭송행복플러스 2016. 5. 30. 05:21



바람 불어 너도나도바람꽃

 

  이원규

   

 

밤의 휘파람을 부니 밤바람이 분다

간절히 바라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파풍(破風)의 대숲에 깃들어 성난 깃털을 쓰다듬더니

수다쟁이 봄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오래 잊었던 눈짓 손짓들의 살가운 부채질

그날 밤 돌담 살구나무 아래 꼴깍 침 넘어가던 소리

하릴없이 손가락 관절을 꺾던 소리

캄캄해도 부끄러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던

신열의 달뜬 너도바람꽃

삼십 년 전의 봄바람이 불어온다

입술 닿은 자리마다 후끈 열꽃이 피어난다

 

지천명을 넘어서야 속살 깊이 되새기는

변산바람 풍도바람 너도바람 나도바람

만주바람 꿩의바람 홀아비바람 조선남바람

회리바람 태백바람 세바람 들바람

하많은 내 생의 바람꽃들에게

그래, 나쁜 놈이야, 나는, 두 무릎을 꿇는다

 

간절히 바라니 다시 봄바람이 분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

그 숲속에서 불던 흙피리 소리 이제야 당도한다

저 바람이 데려오다 흘린 낙엽 하나

오늘밤은 또 어디에서 잠드는지

흰 목덜미를 돌아온 옛 바람들에게

이미 푹 젖은 낙엽의 혀로 안부를 묻는다

네가 바라니 나도 바라는 너도나도바람꽃

죽을 때까지 제발, 죽지 마

애타게 밤의 휘파람을 부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시와 경계》2016년 봄호




이원규 시인/ 1962년 경북 문경군 하내리에서 태어났다. 한국작가회의 총무, 일간지 및 월간지 기자 등의 서울생활을 접고 지리산에 입산한 지 14년째다. 지리산 지킴이를 자처하며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와 지리산학교 등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시간 날 때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사람과 길을 만나러 다닌다. 그동안 3만 리를 걸었으며 100만 킬로미터를 달렸다. 1984년 《월간문학》, 1987년 《실천문학》을 통해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옛 애인의 집》《돌아보면 그가 있다》《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빨치산 편지》 등과 산문집 《지리산 편지》《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벙어리달빛》 등을 펴냈다. 제16회 신동엽 창작상, 제2회 평화인권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