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다음카페이미지/ 시모음: 한국명시낭송예술인연합회 이서윤 )
시월 / 황동규 (서울,1938- )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시월/ 임보 (1940- )
모든 돌아가는 것들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산은 너무 고운 빛깔로 덫을 내리고 모든 남아 있는 것들의 발성(發聲)을 위해 나는 깊고 푸른 허공에 화살을 올리다.
10월 창호문/유안진 (경북 안동, 1941- )
찬서리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는가 어느덧 우리 사랑은 창호문의 꽃무늬 대장부 천금 목청 대닢으로 푸르러 있고 그 옆에 향기 높아 국화는 나의 뜻 절반은 고전이요 나머지는 현대이나 아직도 한 채의 한옥 같은 내 사랑아 이제부터 불빛이 긴 밤을 지킬지니 낙엽 같은 맨발로 홀연 돌아오는 밤도 창호문 바른 솜씨 보아서 아시리.
시월 / 오세영 (전남 영광,1942 - )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 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10월 / 문인수(경북 성주,1945 - )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시월 /이외수(경남 함양, 1946- )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시월 / 이문재 (경기 김포,1959- )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시월 / 기형도(인천, 1960-1989)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 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개의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굴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잠시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 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追憶들은 갑자기 거칠어 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 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 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 였던 때가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시월에/ 문태준 (경북 김천, 1970 -)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10월 / R. Frost (미국, 1874-1963)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는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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