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대한 시/도종환(1955 충북 청주시 )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당신도 가끔은 고요한 얼굴을 만나는가 고요한 물 앞에 멈추어 가끔은 깊어지는가 물이 길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물을 맑은 물은 있는 그대로를 되비쳐 준다 만산에 꽃이 피는 날 산의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 주고 잎 하나 남지 않고 모조리 산을 등지는 가을날은 쓸쓸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준다
푸른 잎들이 다시 돌아오는 날은 돌아오는 모습 그대로 새들이 떠나는 날은 떠나는 모습 그대로 더 화려하지도 않게 더 쓸쓸하지도 않게 보여 준다 더 많이 들뜨지 않고 구태여 더 미워하지도 않는다 당신도 그런 맑은 물 고이는 날 있었는가 가을 오고 겨울 가는 수많은 밤이 간 뒤 오히려 더욱 맑게 고이는 그대 모습 만나지 않았는가
물빛/ 마종기(1939 일본)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로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 물 속에 당신을 비춰 보여 주세요 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세요
나는 허황스러운 몸짓을 털어버리고 웃으면서 당신과 오래 같이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 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된 것이 전혀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물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김소엽(1944 충남 논산시)
가장 부드러운 물이 제 몸을 부수어 바위를 뚫고 물길을 내듯이 당신의 사랑으로 나의 단단한 고집과 편견을 깨뜨려 물처럼 그렇게 흐를 수는 없을까
내 가슴속에는 언제나 성령의 물이 출렁이는 사랑의 통로 되어 갈한 영혼을 촉촉이 젖게 하시고 상한 심령에 생수를 뿌리게 하시어 시든 생기를 깨어나게 하는 생명의 수로가 될 수는 없을까
물처럼 낮은 곳만 찾아 흘러도 넓고 넓은 바다에 이르듯이 낮은 곳만 골라 딛고 살아가도 영원한 당신 품에 이르게 하시고 어떤 어려움과 역경속에서도 오늘도 내일도 여일하게
쉼 없이 나의 갈 길 다 달려가면 마침내 구원의 바다에 다다를 것을 믿으며 물처럼 내 모양 주장하지 않아도 당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뜻하시는 그릇에 담기기를 소원하는 유순한 순종의 물처럼 살 수는 없을까
그늘지고 외로운 곳 닿는 자리마다 더러운 때는 씻어 주고 아픈 곳은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머무르지 않고도 사랑해 주는 냉철함과 장애물을 만나서는 절대로 다투지 아니하고 휘돌아 나가는 슬기로움과 폭풍우를 만나서도 슬피 울며 퍼져 있는 대신에 밑바닥까지 뒤집어 나도 모를 생의 찌꺼기까지 퍼 올려 인생을 정화시키는 방법을 깨달을 수는 없을까
물처럼 소리 없이 흐르면서도 나를 조금씩은 나누어 땅속에 스며들게 하여 이름 모를 들풀들을 자라게 하고 나를 조금씩은 증발케도 하여 아름다운 구름으로 노닐다가 나의 소멸이 훗날 단비로 내려져서 싱싱한 생명나무를 기를 수는 없을까
물처럼 그렇게 흐를 수는 없을까 우리 모두 물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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