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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천렵(川獵)/이병일

시낭송행복플러스 2017. 6. 29. 08:21



천렵(川獵)

 

   이병일

 

 

 

강은 제 몸 구겨 넣지 않고도 퍼런 현기증으로 깊어진다

가장 미끄러운 달이 물비늘을 데리고 수면을 쑤시고 있다

 

물결 높이로 떠 있는 달, 지느러미 없어도 잘 미끄러진다

이렇게 깊은 밤, 물속에서 여자가 걸어나온다

이렇게 묽은 밤, 물속에서 여자가 걸어나온다

 

물고기 여자는 겁이 많았고 비린내가 많았다

나는 그 여자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너무 미끄러워 거품이 일곤 했지만

나는 아가미에 물 흐르는 소리 끊길 때까지 사랑을 나눴다

 

물속으로 놀러가고픈 날씨 속에서 사내아이 둘을 두었다

물에 잘 뜨는 아이들 귀밑에서 아가미가 자랐다

그걸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 그러나 손과 발에 생긴

물갈퀴는 숨기지 않았다 이미 물속을 딛는 부레를 얻어왔으니까

 

아이들은 바위 밑에서 발끝으로 물 아닌 것들을 그리며 놀았다

헌데 여자는 천만년이 흐르는 강에서 비늘 없는 짐승이 되고자 했다

강 바깥으로 밀려나온 나는 저 물고기 여자와 아이들을 그리워한 죄로

반짝반짝 울음을 꺾었다

나는 천렵을 노래하는 모래 언덕이 되어야만 했다

 

 

                       —《애지》2017년 여름



이병일 /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2007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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