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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병/기형도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시가 있는 하루

병/기형도

시낭송행복플러스 2017. 11. 6. 07:27



기형도의「병」감상 / 정끝별

 

 



기형도(1960~1989)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시집『입 속의 검은 잎』(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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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한 한세상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끝끝내있다"고 일갈했던 시인은 이상이었다.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던 윤동주도,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던 이성복도 무병(無病)의 유병(有病)을 노래했다.
   병인(病因)이 역사든 세월이든 사랑이든 우리는 병을 앓는다. 늙은 것이다. 자신의 얼굴이 낯선 풍경화처럼 보일 때 우리는 아프다. 삶이라는 문장에서 주어가 빠지고 스스로 가지 잘린 늙은 나무라고 생각될 때, 어둠에 자꾸 체하고 영혼이 반 토막 났을 때 우리는 단풍든다.
   김수영식으로 말하자면 단지 우리는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갈' 뿐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의 의지이자 시인의 의지이다. 가을 단풍이 든다. 지금 병을 노래하는 자, 아직 젊다는 증거다. 시인들이 병을 사랑하는 이유다.

 

  정끝별 (시인,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