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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백년 노래/장석주

시낭송행복플러스 2018. 5. 29. 07:45



백년 노래


  장석주




대지에 밀과 보리 씨앗이 싹 트게 하고

묵정밭에 콩과 깨가 자라게 하라.

굶주린 자에게 북극의 오로라와 천국을 주고

계곡 시냇물에게 청아한 목청을 틔워 주라.

긴 진통 중인 산모에게 출산을 허락하고

퇴행성관절염 환자에게는 인공 무릎을 주어라.

태어나느라 힘든 아기는 이틀쯤 더 눈을 감게 하고

오늘 죽을 자는 죽음을 하루만 늦추어라.

지어미의 기다림에 꽃을 주고 군산 선창가 술집의

뱃사람에겐 열락과 환멸을 주어라.

훈장을 받는 남자에게 슬픔을 주되

실연한 여자에게는 슬픔의 양을 덜게 하라.

모란과 작약을 사랑하는 이는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슬픔과 마음의 천국을 함께 갖게 하라.

항아리마다 가득 찬 포도주 맛을 더 깊게 하고

노숙자에게 명정의 쓸쓸함을 누리게 하라.

미나리깡 미나리는 파랗고 버드나무 가지는 푸른데

객지에서 떠돌다가 죽은 이의 무덤에는

빗돌을 세우게 하라. 태풍 한가운데 고요한

눈이 있게 하라. 시계추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말게 하고 무연고 무덤엔 제비꽃이 피게 하라.

낮이 밤의 백일몽이듯 당신이 내 환몽인 것을

깨닫게 하라. 춘분에는 춘분의 기분을

갖게 하고 하지에는 하지의 빛이 넘치게 하라.

오늘 멀리 가는 자는 더 멀리 가게 하고

코펜하겐의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걷는 자에게

달콤한 잠과 아침마다 사과 한 알을 먹게 하라.

오늘 부는 바람에게 노래하는 혀를 주어라.

 

 

 

           —계간《시산맥》2018년 봄호



장석주 /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신인상에 시 「심야」가, 1979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햇빛사냥』『일요일과 나쁜 날씨』등 14권. 그밖에 산문집과 인문학 저서 여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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