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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식물도감/안도현

시낭송행복플러스 2018. 12. 10. 13:36



식물도감

 

   안도현

 

 

 

*

호박씨 한 알 묻었다

 

나는 대지의 곳간을 열기 위해

가까스로 땅에 열쇠를 꽂았다

 

*

산수유 가지에 새가 앉았다가

골똘히 무슨 생각 하더니 날아간다

꽃 이름을 몰라서 갸웃거렸을까

 

새야,

다음에 올 때는 식물도감 들고 오너라

 

*

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모과꽃이 핀다

 

*

함박꽃 열리기 세 시간 전쯤의

꽃봉오리 주워 와서

빈 참이슬 병에 꽂아두었네

 

*

산수국(山水菊) 헛꽃 들여다보면

누군가 남기고 싶지 않은 발자국 남겨 놓은 거 같아서

발소리 가벼워질 때까지 가는 것 같아서

 

*

길가 도랑 풀숲에 처박힌 트럭 바퀴 하나

 

물봉선이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

 

*

왼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오른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다투다가 능소화는 폭염을 맞닥뜨렸다

 

*

고수꽃이 지고 나서

꽃자리 동그랗게 배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요놈들 첫날밤을 다들 잘 보낸 모양이다

 

*

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

튀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있다

 

강아지풀

 

*

잔디 깎다가

방아깨비 두어 마리 허리도 잘랐다

그러고도 나 저녁밥 잘 먹었다

 

*

화암사 뒷산 단풍 나 혼자 못 보겠다

당신도 여기 와서 같이 죽자

 

 

           ⸺격월간 현대시학11, 12월호



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간절하게 참 철없이.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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