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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식물도감/안도현 본문
식물도감
안도현
*
호박씨 한 알 묻었다
나는 대지의 곳간을 열기 위해
가까스로 땅에 열쇠를 꽂았다
*
산수유 가지에 새가 앉았다가
골똘히 무슨 생각 하더니 날아간다
꽃 이름을 몰라서 갸웃거렸을까
새야,
다음에 올 때는 식물도감 들고 오너라
*
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모과꽃이 핀다
*
함박꽃 열리기 세 시간 전쯤의
꽃봉오리 주워 와서
빈 참이슬 병에 꽂아두었네
*
산수국(山水菊) 헛꽃 들여다보면
누군가 남기고 싶지 않은 발자국 남겨 놓은 거 같아서
발소리 가벼워질 때까지 가는 것 같아서
*
길가 도랑 풀숲에 처박힌 트럭 바퀴 하나
물봉선이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
*
왼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오른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다투다가 능소화는 폭염을 맞닥뜨렸다
*
고수꽃이 지고 나서
꽃자리 동그랗게 배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요놈들 첫날밤을 다들 잘 보낸 모양이다
*
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
튀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있다
강아지풀
*
잔디 깎다가
방아깨비 두어 마리 허리도 잘랐다
그러고도 나 저녁밥 잘 먹었다
*
화암사 뒷산 단풍 나 혼자 못 보겠다
당신도 여기 와서 같이 죽자
⸺격월간 《현대시학》 11, 12월호
안도현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간절하게 참 철없이』.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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