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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풀리다/이병률

시낭송행복플러스 2019. 2. 25. 11:38



풀리다


  이병률

 

 

 

산에 올랐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불공을 드리러 산사에 온 듯한 할머니

내려가는 길이 위태롭다

하여 나란히 보폭을 맞춘다

 

할머니가 쉬면 나도 쉬고

나무도 쉰다

할머니가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나도 내리막길을 뒤따라 내려가고

계곡물도 내려간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쉬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아무 말 없던 분이, 첫 마디가 그랬다

 

나는 무엇으로 찍어드려야 하나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달라고 말하지만

그런 게 없다고 하신다

옷매무새를 만진 할머니가 자세를 정하고

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드린다

 

사진, 어떻게 전달해드릴까요아드님 전화번호 알려주시면 그리로 보내 드릴게요

 

찍었으면, 됐다.

 

그만 그 소리에 무릎뼈를 저 위에 두고 온 사람처럼 풀린다, 풀린다, 풀린다

 

 

 

         ⸺계간 시 전문지 포지션2018년 겨울호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바람의 사생활』『찬란』『바다는 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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