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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수혈 (외 2편)/조성국

시낭송행복플러스 2022. 2. 10. 07:19

수혈 (외 2편)

 

조성국

 

 

홍등 켜진

황금동 콜박스 근처가 아닌가 싶다

 

빳다방망이 든

써클 선배한테 이끌려 억지 동정을 떼려던 게

문득 생각난

 

유난히 깊고 검푸른 저녁이 아니었는가 싶다

 

하필이면

낭자한 핏빛 홀복을 입고

유리방 속에 진열된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혹시나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가두방송으로 헌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건네었을 듯

 

총상 깊은

광주 천변 적십자병원 응급실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손수 찾아온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내 몸속으로 뛰어내려 스미던

 

늦은 봄밤이 어제이련 듯

생생하기 그지없어서 그런가 싶다

 

굳이 내가 이 본적의 도시를

한 번도 떠나지 못하는

끝내 저버리지 못한 까닭이 있다면, 있었다면

 

 

 

내 나이를 물으니까

 

 

나이를 말할 때면 나는

한참이나 젊어진다

 

아카시아 꽃향기 자욱한

광주 근교 예비군무기고에서 탈취해 온 M1소총

밤하늘에다 대고

세 발 네 발 연달아 쏘아대던

그러니까 교련복 차림으로 옥상에서

계엄군 쳐들어온다는, 카랑카랑하면서 절박하게 이어지던 누나의

가두방송을 새겨들으며

 

불끈 그러나 실은 맞은편

상무관 마룻바닥에 구더기 꿈틀대던 시체를 껴안고

있는 힘 다해

애타게 부르짖는 광경

겁나게

떠올라서 무턱대고 쏘아 올린 총탄

포물선 그으며

티끌 한 점 건드릴 힘도 없이 그냥 툭 떨어지듯

사근사근 대변하듯

 

외신기자회견 마친 광대뼈 붉어진 곱슬머리 형이 올롱한 눈빛 치켜뜨며

덥석 끌어안아 주며

도청 밖으로 재빨리 내쫓아 보내 놓고서는

총 맞은

총을 맞아 주는

지독한 봄날의 어슴새벽

장전된 제 총의 방아쇠를 끝끝내 당기지도 않았던 최후의

 

일각!

 

거기에서부터 나는,

나의 생은 다시 시작되었으니까

당연히 대답이 시퍼런 청춘에 가까워진다

 

 

 

내 몸엔 유골 냄새가 산다

 

 

노제 지내는데

끄으름 냄새가 났다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받으러 수골실에 갔다 맡은

냄새와 똑같은

 

국군통합병원과 505보안대와

접근하면 발포한다는 국가안전기획부 담장

경고의 표지가

붉게 새겨진 잿등 고갯길에서도

살 타는 냄새가 풍겼다

 

신원 확인도 없이

마다리 포대에 담긴 시신을 소각시켰다는 퇴역 군의관의 구술과

그 근동에 살던,

며칠간 유독 장독 위로 희뿌옇게 먼지가 가라앉아 쌓였다는

주민 여러분의 증언

귀담아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냄새가

여태 가시질 않았다

 

아버지 뼈단지처럼이나

그 당시란 말이 아주 크낙한 통증이 되어버린

내 머릿속과 몸에 숙주와 같이 눌러앉아

사십 수년째 함께 살고 있다

 

 

⸻시집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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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국 / 1963년 光州 출생. 1990년《창작과비평》봄호에 「수배일기」연작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슬그머니』『둥근 진동』『나만 멀쩡해서 미안해』『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 동시집 『구멍 집』, 평전 『돌아오지 않는 역사 청년 이철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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