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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도심속 문학기행 3회차 본문

길따라 시따라, 시가 있는 여행

도심속 문학기행 3회차

시낭송행복플러스 2022. 4. 19. 17:43

이서윤과 함께 하는 시낭송행복플러스

시와 해설이 있는 도심속 문학기행 3회차

3회차 남산 정동(10:00-11:50)

 

시청역 1번 출구배재학당역사박물관(예상시간 10:00-10:30)

-이동시간 3240m(10:00-10:03)

-관람시간 27(10:03-10:30)

배재학당박물관백범광장, 안중근 의사 기념관(예상시간 10:30-11:30)

-이동시간 301.5km(10:30-11:00)

-관람시간 30(11:00-11:30)

안중근기념관-남산 시비 김소월 조지훈(예상시간 10:30-11:50)

-이동시간 7430m(11:30-11:37)

-관람시간 13(11:37-11:50)

그 밖의 이야기

-일제강점기 남산신사

-숭례문

-남대문시장

 

 

배재학당

18858월 미국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오늘날의 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고종은 18866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지어 간판을 써 주었고, 그해 10월 학생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목적을 밝혔고,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이라는 학당훈()을 내걸었다. 그리스도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하여 일반 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되었던 인쇄부는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초기부터 영어수업을 비롯한 전인교육을 실천하였고, 초대대통령 이승만과 김소월, 주시경, 서재필, 여운형,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지식인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신문화의 요람이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916년에 세워져 교실로 사용된 배재학당 동관 건물을 그대로 살려 2008년 개관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된 건축문화재다. 역동적인 공간구성과 현대적인 감각을 살린 상설전시장과 매년 새로이 마련되는 기획전시 및 특강 프로그램들로 일반관람객들과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새로운 시각의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김소월(1902-1934) 평북 구성

본명 정식(廷湜). 190286(음력)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하였다.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 《그리워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등을 학생계(學生界)1(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진달래꽃 시집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꼽히는 김소월(金素月, 본명 김정식)의 시집 진달래꽃초판본이 13500만원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까지 경매에 등장했던 한국 현대문학 시집의 최고액 기록을 다시 썼다.

2015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회봉문고에서 진행된 제35회 화봉현장경매에 등장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초판본은 13500만원에 낙찰됐다. 종전까지의 기록은 백석의 시집 사슴이 지난해 11월 기록했던 7000만원이었다.

경매에 나온 '진달래꽃'19251226일 매문사(賣文社)에서 발행된 것이었다. 김소월이 생전에 펴낸 것으로, 발행인이 본명인 김정식(金廷湜)으로 돼 있다. 당시 가격은 120전이었다. 10.5X14.7크기의 234쪽 분량이며,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매소는 중앙서림이었다.

시집에는 대표작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초혼등 그의 대표작 127편이 16부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진달래꽃은 김소월의 사후에도 여러 출판사가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한 작품으로 손꼽혔다.

 

문화재청은 20112토속적, 전통적 정서를 절제된 가락 속에 담은 시 작품이라며 화봉문고 소유 진달래꽃’ 24점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이날 경매에 나온 진달래꽃도 동일 판본으로 알려졌다.

등록문화재 제470호인 '진달래꽃'은 김소월 생전인 19251226일 매문사(賣文社)가 발행했다. 하지만 총판매소는 제470-1호가 중앙서림이고, 470-24호는 한성도서주식회사이다.

 

 

진달래 꽃/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산유화/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못잊어/김소월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료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오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초혼/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백범 김구(1876-1949) 황해도 해주, 독립운동가, 정치인

본명 창수였으나 구()로 개명, 법명 원종, 초호 연하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안악으로 돌아가던 길에 치하포에 머무르다가 일본인 쓰치다가 조선인으로 변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강에 버렸다.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가 머무르고 있다가 해주 감영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인천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됐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인천에서 항만 건설 공사 노역을 하였으며, 감형으로 1915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였다. 194112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1944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과 함께 우익 진영을 대표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6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백범광장

남산공원을 올라가는 도중 산 중턱에 위치한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던 곳이었으나 4·19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허물었다. 19688월 백범광장을 만들면서 김구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 앞으로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고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있다. 공원 내에는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 있고 이시영 선생 동상이 있다.

안중근(1879.9.2 ~ 1910.3.26) 황해도 해주, 독립운동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지었으며, 자라서는 자()로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며 할아버지는 안인수로 진해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은 부유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안태훈이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으며,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노에프스키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의 탐방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10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중국 뤼순에 위치한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14,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기록유산 1972.08.16

소재지 부산광역시 서구 구덕로 (부민동2, 동아대학교부민캠퍼스) 동아대학교박물관

시대 1910

소유자(소유단체) 동아대학교

 

견리사의 견위수명

눈앞에 이익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구요 불망평생지언( 久要 不忘平生之言)

 

논어에 나오는 글귀로써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오랜 약속일지라도 지난날의 말을 잊지 않는다

 

지정종목 보물

지정번호 제569-22

지정일 1993115

소장 안중근의사숭모회

관리단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98-0 (세종로, 문화체육관광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시대 대한제국시대 (1910)

종류/분류 붓글씨

크기 가로 38.2cm, 세로 149cm

 

국가안위 노심초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뜻이다.

 

이 유묵은 안중근이 1910326일여순 감옥에서 순국직전, 안중근의사의 공판정 왕래에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지바 간수에게 써준 것이다. 이 유묵을 보관하던 지바가 죽자 그의 부인과 조카딸 미후라가 이어 보관하였으며, 1980823일 동경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을 통해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기증된 것이다.

이 유묵은 여순 감옥에서 자신을 취조한 일본 검찰관과 경호담당 헌병에게 각각 써준 것으로, 서예적 가치는 물론 일본인조차 안중근의 충절과 의리에 심복하여 애지중지하던 유묵이란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