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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속문학기행 4회차 본문
이서윤과 함께 하는 시와 해설이 있는 도심속문학기행
4회차 예술 문인들의 고향 성북동 일원
∙일시: 2022년 4월 27일 수요일 10:00
∙한성대 입구역 6번출구→성북동 감광섭 집터
∙김광섭집터→조지훈 집터 방우산장
∙방우산장→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김기림 정지용 이상
∙수연산방-심우장 만해 한용운
∙그 밖의 이야기
-길상사와 백석
-최순우 고택(국립중앙박물관 초대관장-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간송미술관
-성락원
-염상섭, 김환기 등 많은 예술 문인들의 고향
-북정마을
● 한성대입구역 4호선 6번 출구
● 채동선 가옥 (1901∼1953) 전남 보성 출생. 작곡가.
일제강점기 시인 정지용이 노랫말을 쓴 유명가곡 <고향>의 작곡가. 조선 최초의 현악 4중주단을 결성했고, 전통민요 채록에도 열정을 쏟으면서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민족음악가 채동선(1901~1953). 그가 1931년부터 말년까지 20여년을 작곡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서울 성북동 성북로 8길 12-8번지 옛 집.
성악곡 가운데 「조국」과 「한강」의 교성곡이 있고, 「현악4중주곡 제1번」과 바이올린독주곡도 있으며, 우리 민요도 채보한 바 있다. 노래집으로 『채동선가곡집』(1964)이 있는데, 「추억」·「동백꽃」·「그리워」 등 10곡으로 엮어져 있다. 1980년에 출판된 『채동선가곡집』 속에 있는 「망향」이 가장 애창되는 가곡이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 김광섭 집터 (1904~1977) 함북 경성 출생, 시인, 독립운동가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성북동 168-34에서 살던 때에 월간문학을 통하여 많은 문인들을 발굴 배출하였다. 광복 전의 문단 활동은 해외문학파로서의 활동, 연극평을 중심으로 한 평론 활동, 시작 활동 등으로 구분된다. 광복 전에 쓰여진 초기 시는 현실 부정과 자기 연민, 기다림 등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이는 1930년대 후반의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 인한 지식인의 우수와 비애를 그린 것이다. 광복 후 발표된 중기시의 주제는 비교적 다채롭다. 『마음』은 자연에 대한 몰입과 영어의 체험, 광복의 기쁨 등을 담고 있으며, 『해바라기』는 전쟁으로 인한 상실의 비애와 향일성(向日性)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후기시인 『성북동 비둘기』에서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환경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인 관심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말년에는 회고와 삶에 대한 초월을 주제로 한 시를 썼다.
성북동 비둘기/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조지훈 방우산장 (1920~1968) 경북 영양 출생, 시인, 국문학자.
서울 성북구 성북동 60-44 개량한옥에서 32년을 살았다. 수필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서 자신이 기거했던 모든 집을 방우산장으로 불렀다.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자신의 영혼이 깃든 곳은 모두 자신의 거처라는 뜻이다. 경북 영양의 생가도, 성북동 집도 방우산장인 것이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펴낸 『청록집』을 비롯해 대표작 대부분이 이곳에서 창작되었다.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도 성북동에서 시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1998년 집은 헐리고, 4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41년 21세에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를 탐독하였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 전국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한 경력이 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작품 활동은 1939년 4월 『문장』지에 시 「고풍의상」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39년 11월 「승무」, 1940년에 「봉황수」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작품 경향은 『청록집』(1946)·『풀잎단장』(1952)·『조지훈시선』(1956)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낙화/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최순우 옛집 (1916~1984) 경기 개성 출생. 학자, 미술사학자
고고미술학자·미술평론가.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관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확장, 발전시켰다.
저서는 《한국미술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가 있다.
● 길상사 백석 (1912∼1996) 평북 정주 출생. 시인
길상사는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1997년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이 있다.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은 가난 때문에 팔려가다시 한 남편과 사별한 후, 기생이 되고 나서 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졌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언제 시인이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있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원각을 시주할 당시 천억이란 돈이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전제산을 희사하면서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하니 결국 승낙을 하고 ’길상사‘를 세웠다. 공덕주 김영한은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게 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성락원 (서울 성북동 별서)
성락원은 서울에 남은 유일한 조선시대 민가의 정원이다. 조선 고종 때의 내관 황윤명이 별서로 만든 곳으로,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이기도 했으며,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황윤명이 이곳을 별서로 조성하기 전에도 아름 다운 자연경관때문에 경승지로 널리 이용되었다고 전해지며, 자연 계류와 지형, 암석 등이 잘 어우러지고, 공간구성 및 경관연출 등의 측면에서 한국 전통정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공간구성은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前苑),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內苑), 송석과 못이 있는 후원공간 등 자연지형에 따라 조원된 세 개의 공간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 전형필 간송미술관 (1906~1962) 서울 출생. 수장가, 문화재수집가
간송미술관은 전형필이 세운, 국내 최초의 사립 박물관 보화각의 현재 이름이에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어요.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72호인 <계미명 금동삼존불입상>을 비롯해 정선, 김홍도, 김정희의 작품, 고려청자, 조선백자, 석탑 등 5000점이 넘는 우리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어요.
한국 전통 미술품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33세 때 세운 미술관이다. 전형필은 우리나라의 문화재와 미술품, 국학 자료 등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일본인에 의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들여 이들을 수집하였다. 간송은 1934년부터 자비로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부지 매입이 완료된 이후 미술관 건립을 기획하여 1938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미술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준공하였다. 보화각은 모더니즘 양식의 2층 콘크리트 건물로,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 미술관이다. 건축물은 박길용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보화각이라는 명칭은 간송의 스승이었던 오세창이 지은 것을 사용한 것이다. 1962년 간송 전형필이 서거한 후, 1966년 간송의 수장품을 정리·연구하기 위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발족되었으며 그 해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간송미술관은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유산들을 멸실 위기에서 지켜내고 보전해 온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 보화각'이라는 명칭으로 2019년 12월 30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68호로 지정되었다.
간송미술관에는 국보급의 문화재만도 1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훈민정음(訓民正音)》(국보 제70호)이 손꼽히며, 고려청자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외 국보급 문화재로 조선백자, 불교 유물로 금동불상 등 다양하다. 특히 국내 최고의 서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미술품으로는 신윤복의 《미인도》와 풍속화 그리고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 겸재 정선의 《풍악산내총람》, 《청풍계》, 《독백탄》 등이 유명한 소장품이다. 또한 정조, 안평대군, 한석봉, 추사의 글씨가 있다. 간송 미술관은 일년에 두번 전시회를 열어 일반에게 공개되는데 봄과 가을에 한차례씩 두번을 공개한다.
● 이태준 가옥 수연산방 (1904~미상) 강원도 철원 출생. 소설가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인 이 집은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하고,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수필 무서록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 등이 쓰여 있다. 이 집은 건물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을 두어 T자형을 이루고 아담하면서도 화려하게 지어졌다. 이 건물의 안방 앞에는 누마루를 두고 그 뒤편에는 부엌과 화장실을 두어서, 공간의 기능을 집약시킨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누마루는 작은 규모의 집에서는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화려하며 사랑방의 기능을 안채에 집약시켰다. 건넌방 앞에 놓인 툇마루는 건넌방보다 바닥을 약간 높이고 ''아(亞)''자 난간을 둘러서 세심하게 고려한 공간임을 느끼게 한다.
● 한용운 심우장 (1879~1944) 충남 홍성 출생. 독립운동가, 시인, 스님.
1985년 7월 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 한용운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님의 침묵/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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