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허준
- 이서윤 시낭송
- 명시낭송
- 한국명시낭송클럽
- 풍경이 있는 시
- 이서윤시낭송
- 현대시
- 한국명시낭송예술인연합회
- 명시
- 신춘문예
- 강서구민회관 시낭송반
- 시인
- 한국명시낭송
- 시낭송
- 이서윤
- 윤동주
- 한국명시
- 장수길
- 세계명시
- 강서구민회관시낭송
- 문학
- 풍경이 있는시
- 시낭송아카데미
- 축시낭송
- 동의보감
- 시낭송행복플러스
- 이서윤 시인
- 좋은시
- 허준박물관
- 애송시
- Today
- Total
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도심속문학기행 6회차 노량진 흑석동 본문
▻시와 역사 해설이 있는 이서윤과 함께 하는 도심속문학기행/ 6회차 노량진 흑석동(10:00-12:00)
∙ 일시: 2022년 5월 11일 수요일 오전10시 노들역 1번 출구 (지하철 9호선/일반열차)
▻조선시대 단종복위운동의 충효사상을 체험하는 공원길 및 심훈 발자취
∙노량진역(노들역)→사육신공원→노들나루공원→용양봉저정→용봉정그린공원
→학도의용군현충비→심훈공원, 효사정→심훈 생가터
∙그 밖의 이야기
-노들섬, 노들강변
-정조 화성행차도와 정약용, 김홍도
∙사육신 공원
사육신(死六臣)은 조선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사건에서 이들 외에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화를 입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단종에 대한 충심과 함께, 왕권 강화를 꾀한 세조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세종 때에 설치된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유학자들로 문종의 즉위 이후 대간(臺諫)으로 조정에 진출했으며, 신권(臣權)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하였다. 세조가 1455년 단종에게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뒤 의정부서사제도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를 실시하는 등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자 이들은 단종을 복위시키고 관료지배체제를 실현하려 했다.
무왕이 천하를 통일했으니 수양산 또한 무왕이 통치하는 주나라 땅이고, 거기서 자라는 고사리 또한 주나라 생산품인데 그걸 먹고 살았으면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라는 성삼문의 호통이었다. 전하는 말로는 그 시를 이제비에 딱 부쳤더니 비가 부끄러워 땀을 쭉쭉 흐르더라는 전설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시는 시조로도 전해진다.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 애달파한다
굶어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먹어야 되는가
비록 푸성귀라도 그게 누구 땅에서 났던고?
천하의 충신이자 의인이던 백이숙제가 부끄러워 땀을 쭉쭉 흐르게 했던 성삼문,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만한 의리를 지닌 성품의 사나이였을까!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恨)하노라”의 한이란 바로 한스럽게, 애달프게 여긴다는 뜻이었으니, 성삼문의 그 뛰어난 기개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노들나루공원
노들나루공원은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공원이다. 초기 이름은 '노량진 배수지공원' 이었다가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본동시민공원' 이라고도 불렸다. 원래는 노량진 배수지가 있는 자리로 배수지가 철거된 이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용양봉저정
정면 6칸, 측면 2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가운데에 온돌방을 두고 양쪽에 툇간을 두었고, 사방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고, 이중량을 둔 오량구조, 겹처마집으로 간소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현재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작은 언덕에 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의 현륭원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 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학도의용군 현충비
6월은 조국을 지키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을 기억하는 달이다. 학도의용군 현충비가 있는 효사정공원. 6.25 전쟁당시 참전한 학생 병사인 학도의용군은 약30만명이고, 그 중 5만은 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비는 전쟁이 끝난 후 1955년에 세워졌다.
∙효사정, 심훈공원
효사정(孝思亭)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붙였고, 그의 아들 강희맹(姜希孟)은 효사정기(孝思亭記)를 남겼는데 강희맹의 이 기문(記文)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금천현 누정조에 기록되어 있다. 정인지(鄭麟趾), 서거정(徐居正), 신숙주(申叔舟), 김수온(金守溫) 등 조선 초기의 학자와 문신들도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詩文)을 남겼다.
옛 효사정은 사라졌으며,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흑석동 한강변을 끼고 있는 낮은 산에 신축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에 그 자리에는 한강신사(일본의 신사로, 웅진신사라고도 하였다)가 있었다. 효사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러 시문을 참고하여 원래 효사정이 있었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자리를 택해 정자를 세웠다.
현재의 효사정은 넓이 46.98㎡의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온돌방 1칸을 들인 건물이다. 민도리집 구조의 5량집이며 난간을 두르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효사정은 예로부터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했고,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현재의 효사정 역시 서울특별시 우수경관 조망명소 중 하나로 선정됐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정자에 오르면 탁 트인 한강의 경관과 함께 북한산, 남산, 응봉산, 동작대교, 한강시민공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사진 출사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병여음성/사숙재 강희맹
南窓終日坐忘機(남창종일좌망기)
庭院無人鳥學飛(정원무인조학비)
細草暗香難覓處(세초암향난멱처)
淡煙殘照雨霏霏(담연잔조우비비)
창에 종일토록 앉아 세상 생각을 잊으니
정원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새만 날기를 배우네.
가는 풀 그윽한 향기 찾기 어려운 곳에는
엷은 연기와 지는 햇살에 비가 보슬보슬 내리네.
∙심훈 생가터
심훈(1901-1936)은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함께 퇴학당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했다. 최초의 영화소설 <탈출>, 영화 <먼동이 틀 때>, 시 <그날이 오면>, 소설 <상록수> 등의 작품을 남겼다.
심훈의 작품으로는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노래한 『그날이 오면』과 함께, 그가 3․1 운동으로 투옥됐을 당시에 어머님께 쓴 편지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더불어 조국 독립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다음은 심훈이「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일부분이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날마다 이른 아침 전등불이 꺼지는 것을 신호삼아 몇 천 명이 같은 시간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으로 기도를 올릴 때면 극성맞은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꿈치를 돌립니다.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함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나이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며 하소연해본 적이 없습니다.
거리의 봄/심훈
지난 겨울 눈 밤에 얼어 죽은 줄 알았던 늙은 거지가
쓰레기통 곁에 살아 않았네
허리를 펴며 먼 산을 바라보는 저 눈초리
우묵하게 들어간 그 눈동자 떠도는구나
원망스러워도 정든 고토에 찬아드는 봄을
한번이라도 전 눈으로 더 보고 싶어서
무쇠도 얼어붙은, 그 치운 겨울에 이빨을 악물고 살아왔구나
죽미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 볼 시절이 올 것을
점쳐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 땅의 선지자로다
사랑하는 젊은 벗이여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거두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의 뿌리를 뽑아버리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 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찌하여 그대들은 믿지 않는가?
겨울 밤에 내리는 비/심훈
뒤숭숭한 이상스허운 꿈에
어렴풋이 잠이 깨어
힘없이 눈을 뜬 채 늘어져
창 밖의 밤비 소리를 듣고 있다.
음습한 바람은 방 안을 휘돌고
개는 짓어 컴컴한 성 안을 울릴 제
절 아닌 겨울밤에 내리는 비!
나의 마음은 눈물비에 고요히 젖는다
이 팔로 향기로운 애인의 어리를 안고
여름밤 섬들에 듣는 낙수의 <피아노>
즐거운 속살거림에 첫닭이 울면
그윽하던 그 밤은 벌써 옛날이어라.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꿈에라도 좋으니 잠깐만 다녀가소서
찬 비는 객참에 부딪치는데 긴긴 이 밤을
아 나 홀로 어찌나 밝히잔 말이냐
그날이 오면/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그 밖의 이야기
-노들섬, 노들강변
-정조 화성행차도와 정약용-설계 실행, 김홍도-기록
조선 22대 왕 정조가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顯隆園)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또는 화성행차도(華城行次圖)라고도 한다. 경의왕후의 환갑잔치 내용을 치밀하게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에 김홍도의 책임아래 최득현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허식 등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들이 제작한 목판화가 남아 있다.
'길따라 시따라, 시가 있는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7회차 도봉구 김수영문학관 (0) | 2022.06.21 |
---|---|
도심속 문학기행 5회차 (0) | 2022.05.04 |
도심속문학기행 4회차 (0) | 2022.04.26 |
도심속 문학기행 3회차 (0) | 2022.04.19 |
도심속 문학기행 2회차 (0) | 2022.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