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도심속 문학기행 5회차 본문

길따라 시따라, 시가 있는 여행

도심속 문학기행 5회차

시낭송행복플러스 2022. 5. 4. 06:49

시와 해설이 있는 이서윤과 함께 하는 도심속문학기행

    5회차 서울시 은평구(10:00-12:00)

 

일시: 202254일 수요일 10:00 불광역(지하철3,6호선) 3번 출구

불광역정지용 초가터

정지용 초가터은평구 셋이서 문학관 버스로 이동

은평구 셋이서 문학관(이외수, 천상병, 중광스님)

진관사, 진관사 태극기

은평한옥마을, 한옥박물관

 

정지용 초가터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126-10. 이곳은 시인이 1948년부터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살던 집이 있었던 곳이다. 시인이 살던 집은 자 형태의 6칸 초가였다. 정지용은 녹번동으로 이사하기 전인 1947년에 경향신문사를 그만두었고, 1948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에서도 물러났다. 사회활동을 그만둔 그는 녹번동 초가에서 시를 쓰고 서예를 즐기며 살았다. 이 자리 에서 남긴 대표 작품은 '곡마단', '사사조오수', '녹번리' 등이 있다. 창작량만으로 본다면 전성기와 비교하긴 어렵지만, 시 외 산문 영역에서도 삶의 태도를 아우르는 작품을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지용(1902~1950) 충북 옥천 출생. 시인. 교육자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곧바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8·15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옮겨 문학 강의와 라틴어를 강의하는 한편, 천주교 재단에서 창간한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화여대 교수직과 경향신문사 주간직은 물론, 기타의 공직에서 물러나 녹번리(현재 은평구 녹번동)의 초당에서 은거하다가 6·25 때 납북된 뒤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1993.4.24., 5.1., 5.7.)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해 정지용이 1950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향수_정지용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은평한옥마을, 한옥박물관

은평 한옥마을은 북촌, 서촌에 이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한옥 단지이다. 여유로움과 도심 속 전원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국립공원 북한산, 그리고 진관사와 어우러진 역사 문화 마을이다. 은평한옥단지는 개인에게 한옥만을 지을 수 있게 토지를 분양해서 소유주의 취향에 따라 각 한옥마다 모양과 나무색이 달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상업시설을 제외한 곳은 대부분 개인의 사유지이기에 내부 관람은 불가하나 소유주의 허락이 있다면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산책로와 편의점, 카페 등 여러시설을 갖추고 있어 나들이를 즐기기에 적당하다.

 

은평구 셋이서 문학관

-도적놈 셋이서(이외수, 천상병, 중광스님 3인공동시화집)(1989)-

 

천상병(1930~1993) 경남 마산 출생. 시인, 평론가

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嬉路市)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 竹筍11집에 시 공상 空想1편을 추천받았고, 1952문예 文藝강물, 갈매기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677월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가난·무직·방탕·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 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19938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나의 가난은/천상병

 

희망의 문학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 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

 

이외수(1946~2022) 경남 함양 출생. 소설가

972강원일보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견습 어린이들이 당선되고, 1975세대문예현상공모에서 중편소설 훈장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돌입했다. 원시생명에 대한 동경과 환상의식을 표현된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1979) 등을 발표하며 섬세한 감수성과 개성적인 문체로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소설가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학원 강사 등의 직장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전념하여 중편 장수하늘소(1981), 장편 들개(1981), (1982) 등을 발표하며 마니아 독자층을 확보했다. 이후 괴물(2002)장외인간(2008)에 이르기까지 환상적 수법이 가미된 유미주의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풀꽃 술잔 나비(1987)를 시작으로 몇 권의 시집도 출간했으며, 외뿔(2001),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2003), 바보바보(2004) 등의 산문집을 통해서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화가로서도 활동하며 수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2006년 선화집 숨결을 출간하기도 했다.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서 집필활동과 문하 양성을 겸하였으며, TV와 라디오 등 각종 대중매체를 통한 독자와의 소통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중광스님(1934~2002) 제주 출생. 스님, 화가

속명은 고창률(高昌律)이며,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걸레스님',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으로 일관하며 살았다. 196026세 때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로 출가하였으나 불교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 때문에 1979년 승적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선화(禪畵)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명성을 얻었고,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높게 평가받았다.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에 참석해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한 후 '걸레스님'으로 불렸다. 1979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랭커스터 교수가 펴낸 책 광승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그로부터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기도 하였다. 미국 뉴욕의 록펠러재단과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대영박물관 등에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중광의 일화는 김수용 감독의 영화 허튼 소리(1986)로 만들어졌고, 이두용 감독의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1990)에는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막걸리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등 과도한 음주와 줄담배로 건강이 나빠지자 1998년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로 들어가 선수행하며 달마 그림에 몰두하였다. 백담사의 오현(五鉉) 스님으로부터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의 '농암'(聾庵)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2000년부터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의 '벙어리 절간'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달마도 그리기에 열중하였다. 200010월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마지막 전시회가 된 중광 달마전: 괜히 왔다 간다를 열었다. 200239일 타계한 뒤 동년 313일 양산 통도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저서로 허튼 소리(1989), 벙어리 절간 이야기(1997) 등과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와 함께 펴낸 도적놈 셋이서(1989) 등이 있다.

 

나는 걸레/중광 스님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는

산산이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 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남한강에 잉어가

싱싱하니

탁주 한통 싣고

배를 띄워라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

떼들이 모여 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오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고기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잔

꺾고서

덩실 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나는 걸레

 

진관사

진관사는 동 불암사, 서 진관사, 남 삼막사, 북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아 왔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이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 하였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명령에 의하여 조종선령(祖宗仙靈)과 순국충열(殉國忠烈), 희생당한 고려 왕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춘추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장엄하게 베풀어 왔었다.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진관사에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독서하게 했다고 한다. 1963년 비구니 진관(眞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30여 년간 복원 불사를 하여 지금의 가람으로 일신 중창하였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

태극기:가로 89cm, 세로 70cm

20095월 진관사 칠성각의 해체·복원 작업을 할 때 발견된 유물이다. 태극기 1점과 독립신문·신대한·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경고문19점으로 구성된다. 태극기는 1919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각종 신문과 문건은 19196월에서 12월 사이에 발행되었다. 누가 사찰에 이 유물들을 감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찰 측은 진관사와 인연이 깊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1878~1944)이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태극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 크기이며, 바탕은 면직물이다. 일제강점기의 태극기 중 사찰에서는 처음 발견된 태극기로, 독립의지를 굳게 세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일장기를 개조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4괘와 태극 문양을 갖추었는데, 건괘 쪽 모서리 부분은 삭았고 중앙에 구멍도 여러 개 나 있다. 재통틀로 박음질한 붉은 원 안에 음() 부분을 청색이 아니라 먹물로 추정되는 흑색 안료로 그려 태극을 표현하였다.

 

태극기에 싸인 채 발견된 신문과 문건에는 3·1운동 이후의 상황을 알리는 기사와 함께 태극기 관련 기사 및 자료들이 실려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은 제30호와 제32호가 각 2점씩 발견되었다. 30호에는 태극기라는 시(), 32호에는 태극의 의미와 태극기 그리는 법 등을 설명한 글이 실려 있다. 진관사 발견 태극기는 바로 이 지침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단재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창간한 신문인 신대한은 제1~3호가 각 1점씩 발견되었다. 2호에는 개천절에 강화도 모처에서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나 일본군에게 압수당하고 수모를 겪은 내용이 실려 있다. 3·1운동 직후부터 국내에서 발행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은 제32, 40~42, 호외가 각 1점씩 발견되었다. 신문 제호란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자유신종보3·1운동 후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자들이 발행한 것으로 알려진 신문으로, 4·7호 각 1, 124점이 발견되었다. 조선노동회경성단이 발표한 경고문3·1운동 후 시작된 자치운동 등에 대하여 강력 경고하고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글이다. 말미에 진관사 발견 태극기와 동일한 모양의 태극기 그림이 실려 있다.

1919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 상황과 태극기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2010225일 국가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