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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본문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 담아들어서는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임동확 저』연암서가, 2013)
기형도 시인/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다. 1980년 대학문학상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된 바 있다. 그후 1982년 대학문학상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식목제>로 당선되었으며,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81년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동인지에 <사강리>등을 발표하며 시작에 몰두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뇌졸증으로 사망했다.저서로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짧은 여행의 기록>,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전집 <기형도 전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