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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뿌리로부터 - 나희덕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뿌리로부터 - 나희덕

시낭송행복플러스 2014. 10. 1. 11:47

 

 

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 지성사 2014)

 

 

나희덕 시인/ 1966년 2월 8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등을 발표했으며,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출간했다. 김수영문학상 · 김달진문학상 ·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