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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몽(記夢)/ 이경교 본문
기몽(記夢)
이경교
출구가 열리자 왈칵, 빛이 밀려든다 캄캄한 실내로 신작로가 뚫린다 빛의 입자들이 꽃가루처럼 부유한다 별빛 부스러기 한 잎을 줍는다 빛의 통로를 따라 해안선이 그어진다 물결 멈춘 지점에 물의 도시가 세워진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다, 저 찰나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도시의 지붕마다 물결 문양이 찍힌다 격자 창틀에
햇살이 갇혀 격자로 쪼개진다 눈 없는 새들이 날아와
모서리를 부리로 찍는다
모든 건 환상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실이다
꽃살무늬 창마다 꽃봉투가 꽂혀 있다 저 봉인된 봉투의
안쪽은 아직도 캄캄한 밤이다 출구가 열리자 왈칵,
꽃씨들이 쏟아진다 모든 게 어둠 안쪽에서 발아하여
여문 씨앗들이다
빛의 궤적을 따라 다시 해안선을 긋자
멈추었던 물결이 출렁인다
도시 하나가 세워지거나 지워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
* 기몽(記夢)은 꿈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소동파(蘇東坡) 선생에게 빌린다.
ㅡ시집 (『목련을 읽는 순서』,문학의 전당 2016)
이경교 시인/ 충남 서산에서 나고, 동국대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중국 CCIT대학 교환교수를 역임하였으며, KBS1 라디오 《책마을 산책》, PBC TV 《열려라 영상시대》 등을 진행하였다. 시집으로 『이응평전』 『꽃이 피는 이유』 『달의 뼈』 『수상하다, 모퉁이』 『모래의 시』, 저서로 『한국현대시 정신사』 『북한 문학강의』 『즐거운 식사』 『푸르른 정원』, 수상록으로 『향기로운 결림』 『화가와 시인』 『낯선 느낌들』 『지상의 곁길』, 역서로 『은주발에 담은 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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