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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사람의 자리/이병률

시낭송행복플러스 2017. 10. 25. 10:08



사람의 자리 

 

   이병률

 

 

 

깊은 밤에

집으로 가는 길에 집 앞에

한 사내가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두 손으로 붙들고 서 있다

 

할 말을 전하려는 것인지

의지하려는 것인지

매달리는 사실은 무겁다

 

사내가 나의 집 한 층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사내가 몇 번 더 나무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지

나뭇가지는 손이 닿기 좋게 키를 내려놓기까지 했다

 

어느 밤에

특히 오늘 같은 밤에는

그 가지가 허공에 팔을 뻗어

말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새를 날려 보냈는지

아이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는 위층 사내도

나처럼 내어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 가지 손끝에서 줄을 그어 나에게 잇고

다시 나로부터 줄을 그어 위층의 사내에게 잇다가

더 이을 곳을 찾고 찾아서 별자리가 되는 밤

 

척척 선을 이을 때마다

척척 허공에 자국이 남으면서

서로 놓치지 말고 자자는 듯

사람 자리 하나가 생기는 밤이다 



     —시집『바다는 잘 있습니다』(2017. 9)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좋은 사람들」 「그날엔」 당선.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눈사람 여관』, 산문집 『끌림』『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내 옆에 있는 사람』 등.  현재 ‘시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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