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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아픈 무릎이 아픈 손을 부르듯/이화은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아픈 무릎이 아픈 손을 부르듯/이화은

시낭송행복플러스 2018. 1. 25. 10:38



아픈 무릎이 아픈 손을 부르듯

 

 이화은

 

 

            

무심히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나를

남편이 또 무심히 바라본다 나는

남편의 뒷목이나 등허리 어디쯤

칼금을 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랜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밑줄을 그어놓고

그 밑줄이 고구마 넝쿨처럼 자라나기를 고구마 넝쿨 같은 한 시절을

무성하게 결박해주기를 바랐던 적도 있었지만

 

오늘 내가 줄 친 시들

시의 급소마다 칼금이 낭자하다

조금만 손에 힘을 주어도 밑줄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밑줄 친 뉴스마다 수갑을 찼다

 

가을비가 공중에 일획을 긋던 날

한 동네 은행잎이 한꺼번에 몽땅 뛰어내렸다

 

밑줄 그은 연애는 모두 앓거나 죽었다

 

비극 아래에 줄을 치는 습관이 언제부터였을까

슬픈 시마다 밑줄이 주렁주렁 변명처럼 달려있다

시에서 피를 보고야 마는 이 가학적인 습관이라니

 

오슬오슬 한기가 들고 미열이 난다 뜨거운 피가 고픈 것이다

뜨거운 피로 쓴 시가 고픈 것이다

 

 

                       ㅡ시와 표현201712월호



이화은 / 경북 진량 출생. 1991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이 시대의 이별법』『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절정을 복사하다』『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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