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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초라한 짐승/ 김태형

시낭송행복플러스 2018. 2. 7. 10:34



초라한 짐승

 

   김태형

 

 

 

화산재가 내려앉은 듯 굽은 골목으로

두 발자국이 남아 있을 뿐

누구였을까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가까스로 남은 쭈그러진 허기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저주와

한 줌의 주먹으로 남은 황막한 곳에서

내가 말하는 것들이 하나씩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말은 숨기에 좋은 말이다

 

가죽나무 아래에서 왜 새가 우는지 아무도 몰라도

벽 뒤에서 밤이 지나간 것을 알고 있다

액자를 떼어내도 그 벽은 있다

소파를 옮겨도 먼지를 쓸어내도

긴 밤은 여전히 깊고 긴 밤으로 남아 있다

못을 쳐서 다시 벽을 만들어도

그 뒤에 지난밤이 지나가고 있다

 

올려다보면 다 고요하다

귀만 자꾸 멀어지는 비가 내린다

나는 내가 한 말이라도

내가 한 말은 내가 되었더라도

아픈 건 드러낼 수가 없다

내가 되지 않으려고 나는 자꾸만 무슨 말인가를 하곤 했다

마른 잎 떨어져 찬바람에 내내 귀가 시린

그런 슬픔 속에 살라고

목젖에 마흔 개의 가시가 박힌 새가 운다

왜 가죽나무 아래 새가 우는지 아는 이 하나 없어도

 

 

 

                     ㅡ《문학사상201712월호



김태형 / 1970년 서울 출생. 1992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코끼리 주파수』『고백이라는 장르, 시선집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아름다움에 병든 자』『하루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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