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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따라 시따라 걷기 9코스, 암송시 이준관 시인님의 '구부러진 길' 본문
♧한강걷기 첼린저
한강따라 시따라 걷기 12코스중 9코스(한강의 변신은 무죄)
-일시: 2021. 3. 4 목요일 10시
-9코스:마포역-한강대교-마포대교-광흥창-공민왕사당-망원정-월드컵경기장역 9.3km
-암송시: 구부러진 길/이준관
*마포역/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수도권 전철 5호선의 지하철역. 행정구의 경우 역명에 따른 마포구에 있으나, 행정동의 경우 역명과는 달리 마포동이 속해 있는 도화동에 있다. 여의나루역과 하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한강대교/총연장 1,005m인 한강에 가설된 최초의 인도교로 1917년 10월에 준공했다. 1925년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되어 가설공사를 실시해 1929년 9월 완공했다.총연장 1,005m인 한강에 가설된 최초의 인도교로 1917년 10월에 준공했다. 1925년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되어 가설공사를 실시해 1929년 9월 완공했다
이후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새 한강인도교 건설에 착수, 1936년 10월 완공했다. 교량 형식은 타이드 아치 강구조로 교량과 강판형교로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타이드 아치 3경간과 판형교 일부가 파괴되어 1957년 1월부터 복구공사에 착수, 1958년 5월 준공되었다.
도시 확장과 인구증가에 따라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1979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교량확장공사가 실시되었다. 교량의 형식은 기존의 교량과 대칭을 이루는 쌍둥이 교량으로 하였다. 한강인도교·제1한강교 등으로 불리다가 1984년 11월 한강대교로 개칭했다.
*마포대교/마포구 마포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연결하는 한강에 있는 다리이다. 조선시대 마포나루가 있어 전국의 물산이 모여 들던 곳으로 처음에는 ‘서울대교’로 부르다가 1984 년 11월 7일 지역의 역사성을 살려 마포대교로 바꾸었다. 1968년 3월에 착공하여 1970년 5월에 완공되었다. 총 공사비는 15억 9,800만원이 소요되었다.
길이는 1,398m로 당시 한강 다리 가운데 가장 길었고, 다리 폭 25m 6차선 좌,우변에 2m의 보도를 갖추었다. 교각은 40개이며 72개의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현대건설에서 시공하였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 서남부 지역으로의 물류 이동과 교통 흐름이 원활해졌으며, 특히 여의도와 마포 일대의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다리 개통 후 30년이 지나자 교량이 노후화되고 교통용량도 늘어나 이 다리 아래쪽에 새로운 다리를 가설하였다. 신교는 마포구 마포동과 영등포구 영등포동을 연결하는 다리로 (주)현대건설 외 4개의 회사가 컨소시엄을 이뤄 참가하였다. 다리의 규모는 상류에 있는 다리와 같으며, 2000년 7월 10일에 준공되었다. 따라서 마포대교는 쌍둥이다리가 되었다. 마포구 마포동에 있는 마포대교 북단IC는 2005년 12월 19일에 개통되었다.
*광흥창/고려 충렬왕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관서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각지의 조선(漕船)이 집결하는 서울의 서강연안 와우산 기슭에 위치하였으며, 관원으로 수(守)·주부(主簿)·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를 각 1인씩 두었으나 후에 영·직장(直長) 각 1인씩을 증원하여 창고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저장하는 세곡은 해운으로 운송된 전라·충청도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녹봉은 초기에 매년 1월·4월·7월·10월의 네 차례 지급하였으나, 1701년(숙종 28)부터는 매월 지급하였다. 1721년(경종 1)에 개정된 월봉이 말기까지 시행되었는데, 정1품은 쌀 2섬8말과 콩 1섬5말부터 종9품은 쌀 10말과 콩 5말까지의 차등을 두었으며,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한 지급의뢰서를 가지고 관원이 직접 창고에서 받아갔다
*공민왕 사당/공민왕을 주신으로 모신 신당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의 공민왕사당이다. 공민왕을 이곳에 모시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 당이 있는 곳은 본디 옛날에 영의정이 녹을 주던 창고인데, 공민왕이 원혼이 되어 갈 데 없이 떠돌아다니므로 그렇게 떠돌아다니지 말고 만조백관들의 녹을 주는 창고나 지키고 있으라는 뜻으로 이곳에 공민왕의 영혼을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밖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었던 부군당에서도 공민왕 내외를 주신으로 모셨는데, 1979년대 후반에 제당이 소멸하고 제의도 그쳤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현석동에는 사도세자를 모신 부군당(뒤주대왕당이라고도 하는데, 기록에는 대동당이라고 하였음.)이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어서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도세자의 원혼을 모시게 되었다는 유래담이 전한다.
이 당에는 해나무 세 그루가 있고 6칸 크기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당이 소멸하였다. 제일은 음력 10월 1일 밤인데 통돼지를 잡아서 제물로 올리는 대대적인 동신제(洞神祭) 형식으로 제를 지냈으나 1989년부터 중단되었다.
왕신신앙은 특출한 위업을 달성한 국왕이나 억울한 삶을 산 국왕을 신으로 모심으로써 국왕의 위력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신앙이다. 단군이나 태조대왕을 봉안함으로써 액운을 물리치고 재복을 받게 된다고 믿으며, 반대로 공민왕이나 뒤주대왕·단종대왕과 같이 억울하게 죽은 왕의 외로운 원혼을 위무(慰撫)함으로써 재액초복(除厄招福)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후자의 경우, 한국인의 정서라 할 한(恨)과 한풀이가 어떻게 민간신앙에 반영되고 있는가 하는 상호관계를 여실히 드러낸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망원정/지금 양화대교 북단, 즉 양화진 서쪽 강변북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망원정은 한강의 수려한 경치를 굽어보는 얕은 언덕 위에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시대의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던 명소 중의 하나였다. 인근의 양화진은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 양천ㆍ김포 방향으로 나가는 큰 나루터로 수상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상 요충지였다.
망원정 자리는 원래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세종 6년(1424)에 별서(別墅)를 마련하고 약간의 농사도 지으며 강상(江上)의 물결을 즐기던 곳이었다. 《궁궐지》에 의하면, 세종 7년(1425)에 가뭄이 계속되자 농민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효령대군의 새 정자에 올랐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매우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효령대군은 왕이 행차한 것은 물론 정자의 이름까지 지어준 것에 감사하여 글씨로 이름을 날리던 부제학 신장(申檣)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문장을 잘 짓는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글은 《동문선》에 〈희우정 기문〉으로 실려 있다. 변계량은 기문에서 “희우정의 제도는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다. 북악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는데, 서남쪽의 여러 산들이 막막하고 아득하여 구름·하늘·연기가 물 밖으로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하다. 굽어보면 물이 맑아 물고기ㆍ새우도 역력히 셀 수 있다. 바람 실은 배의 돛과 모래 위의 새들이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고,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가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 마음이 자유스러워져서 바람 타고 신선세계에 노는 것만 같다. 눈이 아찔하고 머리털까지 곤두서는 듯하다.” 고 칭송하였다.
세종은 그 후로도 수차 희우정에 들러 서교(西郊)에서 벌이는 군사들의 방포·말타기·활쏘기 등 훈련을 친히 사열하고, 시를 짓고 그림도 그리게 하였다. 이 당시 따라왔던 안평대군이 그린 <도원몽중도첩(桃源夢中圖帖)>이 지금 일본 덴리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성종 15년(1484)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퇴락한 희우정을 효령대군으로부터 얻어 고쳐 짓자 성종이 '望遠亭(망원정)'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망원정은 정자에 오르면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잘 바라 볼 수 있음을 뜻한다. 월산대군은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 하여 <한성십영(漢城十詠)>의 한 곳으로 손꼽았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이 지은 시(詩)에 “석양이 늦었다고 높은 다락에 안 오르리, 좋은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난간을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잡으니 이 밤의 놀이 참으로 좋으네.” 라는 구절이 있어 망원정은 강변에 가깝게 있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난간이 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연산군이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공사를 하던 중 그 해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작자 미상의 그림에 의하면, 희우정은 강변 깎아지른 듯한 암반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었는데, 마루 둘레에는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망원정지 앞은 지금 강변북로가 되었으며, 주변 일대에는 주택가가 조성되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1987년에 정자터를 발굴하고, 1989년 7월 정자를 재건하였다. 경사진 언덕에 선 이 정자는 전면은 장초석, 후면은 일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누 형식으로 재건된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 5량가 무고주(無高柱) 이익공 겹처마 팔작지붕에 단청을 하였다.
지붕의 마루에는 양성을 하였고, 첨차 외단 상·하 익공 사이는 분리되었다. 창방 위로는 화반을 두고, '人'자 대공을 사용하여 조선초기 공포 형식을 반영하려고 하였다. 강변북로 쪽 정면 처마 아래에는 '望遠亭(망원정)', 안에는 '喜雨亭(희우정)' 현판을 달았다.
건물 왼편인 동남쪽 아래로는 솟을삼문을 내었으나, 강변북로가 바로 접하여 있어 이 문을 통해 진입하는 것은 불편하다. 건물 뒤 동쪽 아래로는 협문을 세워 일반인들 출입통로로 하였고, 그 옆에 관리실 건물이 있다. 망원정을 바로 옆에서 마주하며 한강을 내려보는 잠두봉에는 절두산 복자기념성당이 서 있다.
*월드컵경기장/서울월드컵경기장(서울월드컵, Seoul World Cup Stadium)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있는 축구 전용 경기장이다.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를 위해 건설되었으며 삼성엔지니어링에서 시공하였다. 총 좌석수는 2014년 2월 테이블석을 설치하면서 기존 66,806석에서 102석이 줄어들어 66,704석이 되었으며 귀빈석 816석, 보도석 754석, 스카이 박스 75실(1실당 12-29명 수용)을 포함하고 있다.
1998년 11월 6일에 착공하여 2001년 11월 10일에 개장된 이 경기장은 아시아 최대의 축구 전용 경기 시설이다. 2002년 FIFA 월드컵 개회식과 개막전을 비롯해 FIFA U-17 월드컵, 피스컵, AFC 챔피언스리그 등 많은 국제 축구 대회를 치렀으며 2001년 11월 10일 개장 기념 경기인 크로아티아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002년 FIFA 월드컵 대한민국과 독일의 4강전이 개최된 경기장이다. 2004년부터 FC 서울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K리그 클래식 축구 경기가 매년 열리고 있으며 2006년, 2014년, 2015년 대한민국 FA컵 결승전이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
서울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과 연결되며 주변에 디지털 미디어 시티(DMC)와 월드컵공원이 있다. 건물 내에는 쇼핑몰인 월드컵몰과 대형 할인점 홈플러스, 메가박스 영화관, 피트니스클럽 등이 있다. 경기가 열리지 않는 날에도 일반인이 방문할 수 있으며, 허가를 받을 경우 잔디 구장 이용도 가능하다.
경기장 부지는 상암지구의 구획에 포함되나 행정구역상 성산동 515번지에 속해 있다. 그러나 건설 당시 경기장 부지가 상암동 1568번지로 잘못 알려졌고[8] 부지 대부분이 상암동인 월드컵공원, 상암 DMC 지구 개발 계획 등과 연계해서 건립된 사유 때문인지,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언론에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혹은 '상암구장'이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행정구역상 상암동에 속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2012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A매치와 K리그 클래식의 FC 서울 홈 경기 등 축구 경기 관중수와 행사 관중수를 합쳐 누적 관람객 1,000만명 시대를 열었으며[9] 세계 10대 축구전용경기장으로 선정되었다.
2014년에는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2014의 결승전 경기가 개최되었다 - 출처 다음 위키백과 -
구부러진 길/이준관 1949~전북 정읍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영등포여고 교사.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시 ‘초록색 크레용 하나’ 당선. 1974년 …『심상』 신인상 당선. 시집 『황야』 『손가락에 달을 달고』 『부엌의 불빛』 등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일시: 2021. 3. 11 목요일 10시
-10코스: 월드컵경기장역-망원시장-하늘공원-가양대교-증미역 9.0km
-암송시: 원시/오세영
구부러진 길/이준관. 시낭송 이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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