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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비를 심다 (외 1편)/ 신영조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비를 심다 (외 1편)/ 신영조

시낭송행복플러스 2021. 11. 8. 07:34

비를 심다 (외 1편)

신영조




비 내리는 오늘은 텃밭에서
당신을 나의 밭에 심었습니다
빗줄기 소리는 시원했습니다
당신을 심는 내 마음에 내내 뻐꾸기가 울곤 했습니다

내 속에 심은 당신이 행여 가뭄 들까
내 속에서 크는 당신이 행여 홍수질까
나의 둑에 갇힌 당신을 어제는 잠시 허물기도 했습니다

뙤약볕이 우리가 걸어간 밭을 쪼개어도
긴긴 장마가 우리가 지나온 길을 없애도
먹먹한 개구리의 기막힌 소식과 함께하면
밭둑에 혼자 서 있는 날도 바람 불지 않았습니다

돌아다봅니다
젖어있던 밭둑도 내일 아침이면 짱짱
장화의 뒤축에 눌린 젖은 날도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가죽나무 사이에 걸린 가죽 같은 건조한 날도
당신과 함께하는 밭둑에서 비를 한번 심는다면
잠시 메말랐던 퇴근길은
막걸리 잔 속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믐




밤이 말없이 다가오는 여인처럼 거룩한 순간

멀고먼 세상에서 온 난파선이 기울어져 있다

문명 이전부터 진행된 희디흰 고독의 침몰

어디로 비출지 모르는 희미한 전조등

옆에 있어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자정처럼

옆구리에 비수 한 자루 품고 있는 저 고요

답답할 때마다 자신의 살을 깎아 먹는 저 허기

눈물을 조각하여 허공에 걸어둔다

반복되는 장면으로 영역을 확보하는 삶과 죽음의 국경선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저 적막한 몸부림



⸺시집 『눈물을 조각하여 허공에 걸어두다』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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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조 / 1963년 대구 출생. 《현대시학》 2005년 10월호 신인상 시인 등단. 시집 『눈물을 조각하여 허공에 걸어두다』. 현재 효성여자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