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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 상자의 세계 / 하린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상자 속 상자의 세계 / 하린

시낭송행복플러스 2021. 12. 17. 08:25

상자 속 상자의 세계

 

하린

 

 

 

방 한가운데에 상자를 놓고

상자 속에 또 상자를 넣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

취급주의가 써져 있으면 좋으련만

열 때 울지 마, 열고 나서 웃지 마, 라고 써져 있으니

도대체 애인은 무엇을 보낸 걸까

돌아온 것이

베개가 기억하던 한숨이라면

옆구리가 갑자기 갖게 된 광장이라면

머뭇거릴 필요 없었을 게다

차라리 죽은 이가 죽기 이틀 전에 보낸 상자라면

심호흡을 하고 죄책감을 품에 안으면 된다

 

그런데 상자 안에 상자라니

감정 안에 감정이라니

내가 당신에게 보낸 건

시나 일기 같은 가벼운 것들뿐인데

흔들고 귀를 대보면 기척이 난다

만약 돌멩이가 들어있다면

기꺼이 난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내어줄 것이고

음산한 분위기를 먹고 자란 음지식물이라면

식물이 화를 내도 다 받아줄 텐데

자학과 자책이 튀어나올까 봐 두렵다

 

아침까지 당신이 누웠던 침대에 그대로 둔다

상자와 함께 잔다

개봉을 또다시 하루 더 미룬다

 

 

 

⸺계간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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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 1971년 전남 영광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 2008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시 창작 안내서 시클. 계간 열린시학부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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