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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7회차 도봉구 김수영문학관 본문

길따라 시따라, 시가 있는 여행

7회차 도봉구 김수영문학관

시낭송행복플러스 2022. 6. 21. 08:47

 

7회차 도봉구 김수영문학관(10:00-12:00)

-지하철 4호선 쌍문역 하차 2번 출구, 130 연산군정의공주묘 하차

-김수영문학관

-원당마을 연산군묘

-정의공주묘

 

 

김수영문학관도봉산역 삼거리

-연산군정의공주묘 130 방학동신한은행 56

 

도봉산역 삼거리김수영 풀 시비

-도봉산삼거리에서 산행

-도봉산 입구 이매창 시비

 

4호선 쌍문역 2번 출구 130번 버스이용하여 연산군정의공주묘 역 하차

 

김수영문학관 kimsuyoung.dobong.go.kr

 

김수영 (1921~1968) 서울 출생, 시인

19211127일 서울 관철동 출생. 효제보통학교를 거쳐 선린상고를 졸업한 후에 일본에 건너가 1941년 동경상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943년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했다.

이듬해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길림 제육고에서 교원을 지냈고 연극운동도 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서 거주하며 통역일을 하였고, 연희대 영문과 4년에 편입(1945)했으나 중퇴했다. 1945예술부락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1949년에는 김경린박인환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해 북한군에 징집, 포로가 되었다가 거제도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으며(1952), 그곳에서 병원장 통역, 석방 후에는 미8군 통역,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1954년 환도 후 주간 태평양, 평화신문에서 근무했고, 1955년 이후 자택에서 양계를 하면서 시작번역평론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 동안 발표한 작품을 모아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9)을 간행했고, 1회 시협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하고 있으며, 헬리콥터, 폭포등이 대표작이다. 1960419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을등이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의 한 전환점을 이루는 이 시기의 지속적인 주제는 사랑과 자유인데, 자유는 그의 시적정치적 이상으로,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다.

 

516 군사정변 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연민탄식풍자 등을 작품화하게 되는데, 그 방을 생각하며,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등을 썼고,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타계하기 직전에 쓴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그밖에도 시여, 침을 뱉어라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하였고, 브라운의 20세기 문학평론(유령소두영 공역, 중앙문화사, 1957), A. 테이트의 현대문학의 영역(이상옥 공역, 중앙문화사, 1962) 등의 번역서를 내기도 하였다. 사후에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한 몇 권의 시선집산문집이 나왔고, 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되었다.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파밭가에서/김수영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않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폭포/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연산군(1476.11.7. ~ 1506.11.6.)

 

출생과 생모

1476(성종 7) 11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씨이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연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 발생

즉위 이후 신승선, 노사신 등 대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으나, 선왕의 명복을 비는 불교식 행사인 수륙재 시행과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즉위 1년 후 생모인 윤씨가 사망하게된 사건의 전말을 알게된 후 방치된 윤씨 능묘 천장두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대립하였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국왕(연산군)과 삼사 사이에 더욱 갈등과 대립속으로 치달았다. 재위 4년인 14987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史草)의 내용이 세조를 비판하고 붕당을 만들어 국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조의제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문제삼아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 등은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많은 신진 사류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왕(연산군)과 갈등을 빚으며 왕권을 견제했던 삼사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연산군의 실정

이후 국왕(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국고의 사정은 나빠졌다. 1504년에는 손녀를 궁중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던 홍귀달이 숙청되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문제로 번졌다.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윤씨가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 ·채청사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에 빠졌다. 경연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그 실정은 극에 달하였다.

 

폐위되어 연산군으로 강등

급기야 1506(중종 1)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정변이 계획되었고 이에 이조참판 성희안 ·중추부지사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다. 실록에는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폐위된지 두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선조 이후 정치 세력들이 붕당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파 대립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었으며, 임진 ·병자 등의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하였다.

 

정의공주

정의공주는 조선 4대 국왕 세종의 차녀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지장보살 본원경을 간행하였다.

 

생애

정의공주(?1477)는 세종이 즉위 전에 출생하였으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오빠 문종이 1414(태종 14)에 출생하였고, 동생 세조가 1417(태종 17)에 태어난 사실에 비추어 1415(태종 15)에서1416(태종 16)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1428(세종 10)에 정의공주에 봉해졌고, 안맹담과 가례를 치렀다. 안맹담은 관찰사 안망지의 아들로, 1428(세종 10)에 죽성군에 봉해졌다가 1432(세종 14)에 연창위로 개봉되었다.

정의공주는 연창위와의 사이에서 42녀를 두었다. 1462(세조 8) 12월에 연창위가 사망하자 2남 안온천이 시묘살이 중 22세로 졸하였고, 1477(성종 8) 2월에 정의공주가 사망하자 4남 안빈세도 시묘살이 중 32세로 사망하였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고 칼로 깎다가 칼끝이 다리에 박히자 공주는 술을 만들고 난 지게미를 데워 상처에 붙여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 후 자석을 가지고 부러진 칼끝을 빼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맹담은 계유정난에 협조하여 성록대부로 가자되었고, 1455(세조 1) 좌익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1457(세조 3) 수록대부에 가자되었다. 이러한 남편의 공훈에 힘입어 정의공주는 세조로부터 노비와 전토 등을 받았다. 또한 성종은 공주의 건강이 좋지 않자 4남 안빈세를 동부승지에 임명하였고, 왕비와 함께 친히 문병을 가기도 하였다. 정의공주는 1477(성종 8)에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에 능하였다.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변음과 토착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들과 공주에게 풀어보도록 하였는데, 공주가 이를 풀어 세종의 칭찬을 듣고 노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또한 세종이 창제된 훈민정음을 공주에게 주어 민간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께 바쳤다고 전해진다.

정의공주는 불교에 조예가 있었다.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세종 승하 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북한산문수사를 중창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도 하지 않는 등 공주 부부는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의공주는 1469(예종 1)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을 간행하였는데, 이는 죽은 연창위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정의공주 간행 지장보살본원경은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에 있다. 연창위 안맹담의 무덤과 함께 있으며, 묘역 앞에 연창위 안맹담 신도비가 있다.

 

도봉산이 품은 사람들

 

유희경

가계

본관은 강화.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할아버지는 유도치(劉道致)이고,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다. 유희경(劉希慶)[1545~1636]은 천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지은 유희경전(柳希慶傳)에 따르면 그를 정확히 노비라고 지칭하지는 않지만 미천(微賤)’한 신분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업동인 것으로 보아 노비 혹은 천인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는 허씨(許氏)이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유순민(劉舜民유우민(劉禹民유성민(劉聖民유사민(劉士民유일민(劉逸民)이다.

 

활동 사항

유희경은 서울 대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종로구 원서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13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자 이 소문을 들은 사대부 남언경(南彦經)이 유희경을 돌보고 가르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유희경의 벼슬살이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내놓아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이 모후인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폐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지만 거절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절의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80세가 되면서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았다.

평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어짊을 흠모하였던 유희경은 남언경(南彦經)이 도봉 서원을 창건하는 데 도움을 주고는 실질적으로 서원을 다스려 나갔는데, 사람들은 유희경이 도봉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노년(老年)을 마칠 계책을 마련한 게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한다. 도봉 서원 앞 계곡에서 유희경이 읊은 시도 전해 온다.

이곳은 수석(水石)의 경치가 뛰어났으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침류대(枕流臺)가 있고, 그 위에 누헌(樓軒)이 있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었다. 유희경은 84세 되던 1628(인조 6) 경기 감사와 양주 목사 일행을 따라 도봉 서원에 왔다가 침류대 누상(樓上)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성해응(成海應)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를 보면, “동구(洞口)에 들어가면서부터 수석문(水石門)의 승경이 많은데 유희경이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유희경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한시를 잘 지었다. 자신의 집 뒤쪽[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라고 하고 그곳에서 차천로(車天路이수광(李晬光신흠(申欽김현성(金玄成홍경신(洪慶臣임숙영(任叔英조우인(曺友仁성여학(成汝學) 등의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하였으며, 이 시를 모아 침류대 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 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 등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그는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는데, 허균(許筠)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그를 천인으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던 남언경에게 문공 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저서로 촌은집(村隱集)상례초(喪禮抄)가 전한다.

 

도봉 서원 아래에 부인과 함께 같이 장사지냈다 하였으나 현재 묘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유희경이 이매창에게 보내는 그리움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이매창(1573-1610) 전북 부안

전북 부안 출신 으로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으로 한 사람으로, 이름은 향금, 호는 매창 또는 계량으로 썼다. ··화와 거문고에 능하였으며 유희경(촌은)과의 사랑으로 이화우 흩뿌릴 제의 명시를 남겼다. 후대 사람들이 매창집을 펴냈다. 부안의 개암사에 그 목판이 전한다.

 

 

이매창에 유희경에에게 보내는

이화우 흩뿌릴 제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송시열(1607~1689) 충북 옥천 출생

조선 선조 때인 1607년에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난 송시열은 김장생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조광조에서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스물일곱 살에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후 서인 세력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다.

송시열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은 그의 제자였던 봉림 대군(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면서였다. 그는 벼슬길에 나가 나랏일을 보기 시작했는데, 효종과 북벌 계획을 상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효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효종의 왕비인 인선 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이어졌다. 송시열은 당파 간 다툼(당쟁)으로 번진 예송 논쟁 끝에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송시열이 정치에서 떠나 있는 동안 임금이 숙종으로 바뀌었다. 어린 숙종이 그를 불렀지만 송시열은 제자인 윤증과의 불화로 정치에서 물러나 청주로 내려갔다. 하지만 숙종이 후궁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고 그녀의 아들을 원자로 삼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약을 받았다. 1689년에 그는 죄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지만 서인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은 뒤 그의 명예도 회복되었다.

 

도봉동문-‘도봉동으로 들어가는 입구

 

정한모(1923~1991) 충남 부여 출생, 국문학자, 시인

호 일모(一茅). 충남 부여(扶餘) 출생. 1955년 서울대학 문리대 국문과, 1959년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공주사범대학 강사, 휘문고교 교사(1954~1958), 동덕여대 교수(1958~1966)를 거쳐 서울대학 문리대 교수로 있으면서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45년 동인잡지 백맥(白脈)에 시 귀향시편(歸鄕詩篇)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이어 동인지 시탑(詩塔)6집까지 주재했으며 전광용(全光鏞) 등과 주막동인으로 활약했다.

그의 시는 주로 인간의 본질적인 순수서정을 노래하였으며, 휴머니즘을 외치는 시인이다. 그의 언어는 직절성(直截性)과 명징성(明澄性)을 가졌으므로 강건하고 유연한 리듬을 지니고 주제의 선명도를 유지한다. 표현기법에서 비유를 쓰는 편인데 시를 실험에 빠지게 하거나 난해하게 하는 일은 없다. 시집으로 카오스의 사족(蛇足)(1958) 아가의 방(1970) 등이 있으며, 현대작가연구(1959) 등의 저서가 있다. 한국시인협회상(1972)을 수상했으며,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시비-하나될 새날을 열고자

 

정한모(1921~1992) 경남 하동 출생, 언론인, 소설가

호는 나림(那林). 1921316일 경남 하동 출생. 194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문예과를 졸업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불문과에서 공부하다 학병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중퇴했다. 광복 후에 귀국하여 진주 농과대학 교수(1948)와 해인대학 교수(1951)를 지냈고, 국제신보주필(1955)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57세대에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보기 드문 지적 문체와 듬직한 역사 의식 및 폭넓은 제재로 해서 등단 수년만에 작가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 매화나무의 인과(1966), 관부연락선(1968~1970), 마술사(1968), 쥘 부채(1969) 등의 중·장편을 썼으며, 소설집 마술사(1968)를 펴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정력적인 창작으로 작가적 역량을 과시한다. 지리산(1972~1978), 여인의 백야(1972~1973), 산하(1974~1979), 낙엽(1974~1975), 행복어사전(1976~1982), 조선공산당(1976), 황백의 문(1979~1982) 등이 그 예다. 그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1980년대에 와서도 그치지 않는데, 그 중 미완의 극(1981), 유성(流星)의 부()(1981), 그해 5(1982), 니르바나의 꽃(1985), 소설 남로당(1987)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계와 언론계에 종사하던 그가, 40대 중반에야 뒤늦게 소설가로 등단하여 문단활동 27년 동안에 장편과 작품집만도 60권이 넘게 발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도쿄 유학이나 학병 및 분단 등 민족적 현실에 대한 체험을 성공적으로 작품화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다양한 역사 체험과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두루 걸친 그의 해박함이 낳은, 관부연락선, 지리산등의 소설은 분명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성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