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시낭송행복플러스(시와 함께 가는 행복한 삶)

꽃을/김경인 본문

아름다운 시편들/명시. 좋은시

꽃을/김경인

시낭송행복플러스 2015. 8. 24. 07:33

 

꽃을

김경인



 

꽃을 주세요*

흔들리는 창문을 위해 흰 꽃을 주세요

창문을 그을리며 타오르는 촛불을 위해


꽃더러 보라고

서투른 화가의 자화상을 단숨에 잘라내는 가위의 반짝이는 살기를

흰 꽃더러 보라고

화가의 붓끝에서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똑똑 떨어지는 물감의 슬픔을


꽃을 던지세요

검은 계단을 내려가 더 검은 모퉁이를 돌아 마침내 다다른 초록빛 철문 앞에

흰 꽃을 던지세요

더 검은 모퉁이 끝 계단에 앉아 비로소 떠올리는 초록빛 철문의 기억 앞에


초록 철문 앞에서 망설이며 뒤돌아서는 늙은 그림자에게

마치 꽃이라는 듯

안개 속에서만 떠들 줄 아는 물병의 닫히지 않는 마개에게

흰 꽃 아닌 건 모두 잊었다는 듯


그 해 여름, 빨강과 초록이 내민 힘겨운 악수를 위해

꽃을 향해 달려가는 꽃처럼,

여름을 반성하는 영원한 여름을 위해

꽃을 향해 달려가 마침내 사라지는 그 꽃처럼,


심장인 줄만 알고 입 맞추던 너의 차가운 두 발에

기쁨의 첫 페이지에서 흘러내려 귀갓길을 적시는 피 위에

흰 꽃을,


깨어진 거울 앞에서 가장 또렷해지는 절망의 이목구비에게

거울을 꿈꾸다 꿈속의 거울에 갇힌 물고기에게

꽃을,


집을 삼킨 채 비로소 잠잠해진 얼굴에게

얼굴 밖으로 흘러나와 다시 떠들기 시작하는 집 앞에

흰 꽃을,


흉터 위로 또 엎질러지는 끓는 주전자에게

주전자가 몸에 그려준 어여쁜 새 지도에게

보랏빛 바이올렛은 말고


밤물결로

파도치는 나의 심장에게 새빨간 맨드라미는 더 말고


꽃을,

같은 고백을 여러 번 늘어놓은 모노드라마가 끝나듯

내 안의 세계가 문득, 자전을 멈출 때

어둠 속에서 먼지처럼 풀썩거리며 날아오르는 질문들의 빛나는 이마에

흰 꽃을,


* 김수영, 「꽃잎 2」중에서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한밤의 퀼트』『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등

 

'아름다운 시편들 > 명시.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이하석  (0) 2015.09.08
자동판매기/ 최승호  (0) 2015.08.27
한 밤의 퀠트/ 김경인  (0) 2015.08.24
숲/ 김경인  (0) 2015.08.24
정선 아라리, 당신/ 우대식  (0) 2015.08.22